밥과 똥

(생략…) 의용군 체계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주요 목표는 장교와 사병들 사이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장군에서 사병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똑같은 봉급과 똑같은 식사 제공과 똑같은 군복을 입었고, 그들은 완전한 평등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하였다. 만약 누군가가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툭툭 치며 담배를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었으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하여간 이론적으로 모든 의용군은 민주적이었고, 계급도 없었다.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했으나, 명령을 할 때는 상관이 부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동료에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했다. 장교와 하사관 등이 있었으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군대 계급은 없었다. 다시 말해, 계급 명칭이나 계급장 등이 없었고, 부동 자세를 취하거나 경례를 하는 법도 없었다. 그들은 군대 내에서 일시적이나마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산 표본을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지만, 내가 보아 온 것보다, 혹은 전쟁 때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그러나 첫눈에 들어오는 전선의 복무 상태가 나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꼴의 군대가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점은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지적한 것이었다. 비록 이 지적은 사실이긴 하지만 이성적이진 않다. (생략) 훗날, 훈련과 무기 부족으로 인한 의용군의 잘못을 평등 체계의 결과라고 비난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실제로 새로 모집된 의용군들은 군기가 안 잡힌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교가 사병을 ‘동지’라고 불러서가 아니라, 신병들이란 항상 군기가 안 잡힌 오합지졸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민주적인 ‘혁명적’ 형태의 군기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믿을 만하다. 노동자들의 군대에서는 군기란 이론적으로는 자발적인 것이다. 그것이 계급에 대한 충성심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 부르주아 군대의 군기는 궁극적으로 두려움에 근거를 두고 있다.(의용군을 대치한 인민군은 이 두 형태의 중간쯤이었다.) 의용군에서는 일반 군대에서 행해지는 기합이나 욕설 등이 전혀 없었다. 일반 군대에서 행하는 벌을 주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매우 심각한 군율 위반자에게만 한했다. 예를 들어 명령 불복종자에게는 바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동지’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해서 해결한다. 사병들을 다루어 본 경험이 없는 냉소적은 사람들은 이런 방법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당장 말하겠지만, 사실 장기적으로는 ‘효과’가 있다. (…생략)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풀무질), 31-32쪽.

한국 군대를 저렇게 바꾸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기를. (나 빨갱이 아니니까 젭라 국보법으로 잡아가지 마셈. ㅋㅋㅋ)

전에 휘연님이 “군 민주화 어쩌구 하는데 사실 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민주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잖아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군의 목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마는 군 민주화는 여전히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상명하복식 계급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고, 불가피한 필요악은 기능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한정해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인용한 오웰처럼, 제한적이나마 두 나라의 군대를 경험해본 사람으로서(ㅋㅋㅋ), 돌이켜보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음식 차별이었습니다. 야외에서 훈련을 받는 날, 땡볕 아래 짬밥차가 실어온 짬밥을 허겁지겁 받아 처먹고, 메이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말통에서 공용컵에 물을 받아 처마시던 훈련병들과는 달리- 따로 도시락(?)을 챙겨와서 그늘막 아래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음료와 함께 우아하게 잡수시는 하사관/장교들을 바라보며, 그 당시에도 열불이 좀 뻗치긴 했습니다만, 원래 군대라는 것이 그런 것이려니 했습니다.

초식동물인 양들이야 풀 뜯어먹으면서 목동의 소세지 도시락을 탐하지 않겠지만- 같은 인간끼린데, 나도 땡볕에 그늘막 좋아하는데, 나도 차가운 음료수 좋아하는데, 나도 우아한 도시락 좋아하는데, 솔직히 배알이 꼴렸습니다.

전에 의정부 보충대에서 악몽 같았던 화장실 청소 얘기를 썼을 때, 깨끗한 기간병 화장실은 따로 있었다고 살짝 언급했었죠. 이 때에도 군대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려니 했습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 화장실 따로 있고 학생 화장실 따로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었더랬죠.

제주도 똥돼지들이야, 주인님들께서 위에서 쾌변하시면 밑에서 맛있게 냠냠쩝쩝하겠지만- 나도 사람인데, 나도 쾌적한 순백의 변기통 좋아하고, 내 똥이 지들 똥보다 더러운 거 아닐텐데, 솔직히 배알이 꼴렸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도중만큼은, 신성하다고 말로만 뻥치지 말고, 겨우 밥 먹고 똥 싸는 문제로 사람 배알 꼴리지는 않게 해주는 것이 군 민주화의 초석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어처구니 없는 사건. 가족 분들께는 애도를…

전에도 말했듯이 군대는 인간을 살인기계로 거듭나게 만드는 곳이다. 여기서 기계라 함은 특정 자극에 그저 단순하게 반응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복잡한 고민이 요구되지 않으며 미리 입력된대로만 하면 되고, 해야 된다는 얘기.

그 중에서도 초병 근무는, “수하 불응시 발포”라는 최고로 간단한 자극-반응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얼굴을 아는 대대장이 와도 똑같이 반응했더니 포상휴가를 주더라는 전래동화마저 있지 않던가! 아마도 이 때문에 탈 것이 아닌 인간 대체형 로봇으로서는 가장 먼저 개발되어 만들어지고 있는 듯.

그러니까. 북한의 초병에게 인간으로서의 상식적 대응을 기대하기 전에, 이미 시제품이 슬슬 나오고 있는 로봇 초병을 떠올려보자. 미국에서는 인명(이라고 쓰고 인건비라고 읽는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국에서는 아마도 국익창출(이라고 쓰고 수출 전 클로즈드베타라고 읽는다.)을 위해 개발 중인 걸로 알고 있다.

그나저나 아직까지 로봇이 군인을 대체하지 못한 것은 100% 돈 때문임. 어떤 나라든 제 정신이라면, 단가만 맞으면 모든 군인을 로봇으로 대체할 것이 확실. 이미 상당부분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나는 이것이 궁금하다. 멀쩡한 사람에게도 사람다운 반응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안달인 마당에, 과연 이 로봇 초병에게 어느 나라의 국방부가, 단가 상승은 차치하고서라도(ATOM을 쓰자.), 여자나 아이, 대대장을 알아보고 반응을 달리할 정도로 복잡한 인공지능을 달아주고 싶어할 것인가?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모의 선거를 실시하라

  1. 밑에 글을 쓰고 나서 내가 어쩌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가-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역시 군대 시절 부대 근처 투표소로 끄들려 가서 투표를 하고, 일괄적으로 부재자 투표를 하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반성해보게 된 것이 그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_-;;; 내가 뭘 하는 것인 지 전혀 모르는 채로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렇다고 중복표기 등으로 기권표를 찍는 기분도 매우 더럽더라. 그러니 별 수 있나,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수밖에. (-_-) (_-_) (-_-)
  2. 그렇다면, 투표를 의무화하는 게 좋다는 결론이 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말했듯이 그건 또 싫다. 다 큰 어른들이 투표를 할지 말지는 뭐 자기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싫다는 사람까지 억지로 끌어올 일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슨 분단국가 국방의 의무도 아니고… 사실, 내 기본 입장과 일관적인 정답 결론은, 군대에서조차 부재자 투표를 일괄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사람은 할 수 있게끔 창구를 마련해주는 것일 테다.
  3. 1의 깨달음과 2 입장의 고수가 빚어내는 내적 모순이 나로 하여금 “중고등학생의 모의 선거”라는 일견 어이없는 발상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덤으로, 난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대체 뭘 배웠나 하는 개인적인 안타까움도 해소된다.)
  4. 중고등학생들에게 사회/정치 수업의 일환으로 총선이나 대선, 아니면 지역의회 선거, 교육감 등등등을 뽑는 선거를 적당히 시킨다면 최고로 많아봤자 일년에 한번 꼴일 거다.
  5. 그렇다고 중고등학생들에게 선거권을 주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그 표까지 동시에 개표하여 실제 선거에 반영할 필요는 없다. 그냥 대충 학급별 학교별로 교사 지도하에 실시하면 됨. -_-; 이를 테면 교육적 차원에서 모의 선거를 시켜보자는 거지. 실제 선거와 동시에 이루어질 필요도 없고, 좀 일찍 하거나 나중에 해도 되고 뭐. 전국적으로 집계해서 어른들도 함께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할 거다.
  6. 수업 시간 몇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하여 특정 후보 찬조연설;;;이라던가 정책이나 후보에 대한 찬반 토론 따위를 시켜보는 것도 매우 교육적일 것이다.
  7. 이런 수업을 한 세대에 걸쳐서 하고 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뭔가 바뀌어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음.
  8. 물론 이 “모의선거 수업”을 위한 홍보 문구는, “시사 면접 및 논술 대비”로 해야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들아 군대 가지 마오

전에 무슨 군대를 가야 하는 이유 어쩌고 쓴 걸 보고 울컥하는 마음에 쓰다가 말아서 임시저장되어있던 건데… 그냥 대충 정리해서 공개합니다.

1. 훈련소에서 총검술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총 끝에다 도검을 매달고, 그것을 쓰는 여러가지 동작을 익히는 건데요. 그 중에 가장 기본적인 동작으로 “찔러총”이라고 있습니다. 양손으로 단단히 잡은 소총을 앞으로 힘차게 뻗었다가 다시 당기는 간단한 동작이에요.

찔러총 신나게 배웠으면 써먹어야죠.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라는 다소 유치한 구령을 외치면서 뭐 이런저런 장애물을 통과(십오 년 쯤 전에 일요일 아침마다 하던 장애물 통과 쇼를 연상하시면 돼요.)합니다. 꼭대기에는 사람 키만한 막대기들이 서있는데요. 막대기에 묶여있는 타이어를 찔러총 동작으로 찌르고 돌아오라고 하더라구요. 사실 우리 훈련병 꼬꼬마들에게 타이어는 그냥 타이어일 뿐이죠. 그냥 픽 찌르고 오면 잠시 퍼져서 쉴 수 있는 마지막 장애물 코스일 뿐. 하지만 저처럼 상상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_-* 꼬꼬마의 눈 앞에는 피 튀기는 전장의 그림이 펼쳐져요. 이때 배경은 우거진 한국형 야산이 좋겠소. 때는 꽤 어둡지만 그렇다고 아주 깜깜하지는 않은 초저녁 무렵이 적당하겠소. 어스름한 새벽이어도 좋소. 적은 무시무시한 북한군이 나옵니다. 못 먹어서 키 작고 말랐지만 다부지고 악에 바친, 나름 전형적인 저의 상상 속 북한군의 모습으로 출연하곤 해요. 포격도 아니고, 총알 빵야빵야도 아니고, 총검을 맞대는 상황까지 왔으니, 둘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겠습니다. 제 눈 앞에 있는 북한군은 저의 FM 총검술에 심장을 꿰뚫립니다. 찔러총 마지막의 비틀어 빼는 동작은 상처를 보다 크게 하여, “적”을 보다 확실히 죽이기 위한 것이겠죠. 그렇게 제 총검에 심장이 쥐어뜯긴 북한군 꼬꼬마는 죽어갑니다. 무더운 여름 날, 나무에 묶인 수 많은 타이어들 중 몇몇 타이어는 그렇게 피를 왈칵왈칵 쏟으면서 고꾸라집니다.

2. 총도 사실 신나게 쏩니다. 만화나 영화에서만 보던 빵야빵야를 드디어 직접 해볼 수 있다니, 소년의 가슴은 설레입니다. 허구헌날 닦아댄 덕분에 총기 분해조립 정도야 포레스트 검프처럼 잘할 수 있습니다. PPT로 조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호흡을 언제 멈춰야 하는지, 방아쇠를 어떻게 반쯤 당겼다가 마저 당겨야 하는지 이론부터 배웁니다. (카메라 반셔터랑 비슷해요!) 처음 실제 총알을 쏘러 간 날, 귀가 멍멍했습니다. 총소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산이 쩌렁쩌렁 울립니다. 뭐 잘못하면 눈탱이가 밤탱이 될 거라고들 겁 줬던 반동은 생각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영점을 맞추느라 종이에다 대고 세 방을 빵야빵야 쏘는데, 이게 처음엔 무지 신기합니다. 멀리서 육안으로는 이게 제대로 쐈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가서 보면? 콩알만한 구멍 세 개가 뽁뽁뽁 뚫려 있어요. 하하하. 그리하여 저는 expert shooter가 되었습니다. 군복 입혀놓은 꼬꼬마가 한 대의 어엿한 킬링머신으로 거듭나는 자랑스러운 순간입니다. 레인보우 식스보다 훨씬 재밌어요!

종이 과녁에 있는 검은색 표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근데 저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꼬꼬마의 눈에는 이게 언뜻언뜻 진짜 사람처럼 보여요. 아 250m밖의 사람은 저렇게 작아 보이겠구나. 아 50m안의 사람은 저렇게 커 보이겠구나. 마찬가지로, 50m밖의 적에게 나는 헤드샷감이겠구나. 이제 사격장은 다시 초저녁, 혹은 새벽녘의 전장이 됩니다. 또 다시 아까 죽었던 북한군들이 출연합니다. 빠꼼 머리를 내민 50m 앞의 적의 머리에 두 방을 쏩니다. 빵야빵야. 100m 앞의 적은 좀 작네요. 머리를 노리느니 배때지를 노립니다. 빵빵. 250m나 멀리 떨어진 적은 사실 맞출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만, 근처에라도 쏴야 쫄기라도 하겠죠. 또 빵빵. 다 쐈으면 다시 50m부터 빵빵.

그렇게 종이 타겟에 빼곡한 시꺼먼 형체들에 뚫린 구멍들에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옵니다

3.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군대란, 추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야 조국을 지키는 곳이겠지만-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동원되는 개개인에게는, 효과적으로 체계적으로 사람 죽이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에요.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을 해도, 그건 변하지 않아요.. 개개인을 소총 조작 에이전트로 만들 뿐만 아니라, 분대, 소대, 중대, 대대라는 이름의 킬링 머신 속에서 기능하는 교체 가능한 부속으로 제조하는 곳입니다. 다른 킬링 머신과 맞붙어 싸우게 하기 위해서죠. 그런 곳에 갔다 와야만 하는-즉, 그런 것이 되었다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하는 한국 남자들 생각을 하면 눈물이 다 나려고 그래요. 그 소속감, 아니 그 부속감을 떨쳐내고 다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초질하고 다니는 대한민국 꼬꼬마 예비역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4. 여러분,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제발 가지 마세요.
가야만 한다면, 아무 생각 없이 다녀오는 게 최고에요. 머리를 비워요. 휴가 나가서 만날 친구들만, 함께 먹을 맛있는 음식들만 생각하세요. 저처럼 잡생각이 들기 시작하거든- 빵야빵야 방아쇠를 신나게 당겨요. 귀가 멍멍해지고 화약 냄새가 코에 익숙해질 때 쯤이면- 그 눈물도 그칠 겁니다. 죽는 건 사람이 아니라 킬링 머신의 부속일 뿐이니까요.

똥 닦는 휴지 이야기

이미 몇 년 된 이야기입니다.

훈련소에서 똥 닦는 휴지를 일인당 한 달에 하나 줬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똥 닦는 습관이 각기 다르죠. 훈련소에서 제가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제 휴지 사용량이 상당히 적은 편이고, 또 규칙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칸수를 재어 끊어 쓰는 사람부터가 별로 없더군요. 손에 후두루룩 말아서 쓰던데 그렇게 한 다음 어떻게 쓰는지는 저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첫 달에 휴지 하나씩을 나눠줬습니다. 첫 달의 반도 안 지났을 무렵부터 자기 분량의 휴지를 다 써버리고 남의 휴지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무 명이 한 방에서 동고동락하는 뜨거운 전우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서로 팬티까지 훔쳐가는 배틀로얄의 세계에서는 다들 자기에게 남은 휴지의 양에 대해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빌려 쓰고, 구걸해서 쓰고, 심지어 몰래 쌔벼쓰는 인간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훈련소를 나와 보충대로 들어갔던 두번째 달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땐 인간의 학습능력이란 것에 대해 큰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치약과 구두솔로 닦아야 했던 훈련소 새 막사의 화장실과 달리 수십년 된 보충대의 화장실은 바가지로 물을 퍼 내려야 했고, 소화전 호스로 청소 대작전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물론 기간병 화장실은 깨끗하게 잘 관리가 되고 있었지만, 청소는 할 망정 거기서 쌀 순 없었죠. 교직원 화장실마냥 드럽고 치사한 느낌이랄까.. 추석이 끼는 바람에 그런 보충대에서 일주일 남짓 살아가는 동안 단 한번도 똥을 싸지 않았던 용자들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동기들을 참으로 존경합니다. 저는 첫날에 굴복하고 코를 막고 울면서 닫히지 않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 밑이 보이지도 않는 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똥을 싼 후 바가지로 물을 퍼다 똥물을 내렸었거든요.

보충대를 나서기 하루 전쯤인가 처음으로 px를 이용할 시간이 주어집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동기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은 바로 두루마리 휴지였습니다. 은전한닢이 갖고 싶었다던 아저씨의 마음을 똥구멍 깊숙히에서부터 사무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하얗고 두꺼운 휴지 한 롤. 난생 처음 가본 피엑스에서 이거 하나를 샀더니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 휴지 한 롤을 가슴에 품고 고이고이 쓰다듬으며 먹었던 과자가 뭐였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는 나도 마음껏 똥 닦을 휴지를 쓸 수가 있구나 하는 기대에 부풀어 그날 저녁밥은 많이도 퍼먹었습니다.

그 다음날 의정부 캠프 잭슨에 들어가게 됩니다. 카투사 교관은 아이들 간격을 벌려놓더니 바닥에 개인 물품을 쏟아놓으라고 합니다. 그가 제 휴지를 집어들며 이런 건 필요없다며 냅다던져버렸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올 뻔했습니다. 아니 왜. 아니 도대체 왜?! 내 똥은?! 내 똥은 어떡하라고?!

한 방에 서너 명 들어가는 방 두 개마다 하나씩 욕조 딸린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탐스러운 미제 휴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비록 보송보송 엠보싱도 아니고, 기름종이처럼 거친 미제 휴지였지만. 이 각박한 세상에 공용 휴지를 쓰라니 양키놈들의 몰상식함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벌써부터 마음껏 풀어쓰는 룸메이트들을 보며 이제 앞으로 저 휴지가 떨어지면 나는 똥을 쌀 때마다 샤워기로 온수 비데를 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도 잠시. 휴지는 떨어지면 바로바로 재보급되었습니다. 쓰는만큼 쓰고, 다 쓰면 새로 줬습니다. 울 뻔했습니다. 더 이상 변기 청소를 치약 묻힌 구두솔로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소화전 호스를 땡겨다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ajax와 paper towel과 409 spray가 즐비했습니다. 오오 뷰티풀 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