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adence in the rye

The Great Question of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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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한다

Posted by intherye on 2009년 01월 8일

원문: http://www.theonion.com/content/opinion/people_like_food

오늘날 사람들이 뭔가에 의견을 함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항상 잘 차려입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만화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람들이 나오는 것만을 보고 싶어한다. 중간 지대는 어디에 있는가? 없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음식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한다.

자 내 주장에 반대하기 전에, 잠깐만 생각을 해보시라. 나랑 얘기해봤던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하더라. 우리 엄마도 음식을 좋아한다. 내 동생도 음식을 좋아한다. 우리 양아버지는 우리 엄마보다도 음식을 더 좋아한다. 모르긴 몰라도 대통령도 음식을 좋아할 것이다. 그와 식사를 함께 했던 적은 결코 없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밥상 앞에서 커다란 사발에 마카로니 앤 치즈를 먹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노숙자들은 음식을 사기 위해 허구헌날 내게 돈을 구걸하더라. 내가 보기에 음식이란 상당히 인기가 있는 듯하다.

또, 잘 생각해 보면, 음식이란 것에는 좋아할 만한 점이 참 많기도 하다. 맛도 있고, 먹기도 좋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뿐이지만, 그 두 가지만으로도 나는 음식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방금 막 또 하나가 생각났다. 음식은 아마도 우리가 입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건강에도 가장 좋은 것일 듯하다. 못 믿겠으면 아무 의사한테나 물어봐도 좋다.
그리하여, 과연,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 람들이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서 큰 게 하나 있는데, 내가 지금 그것을 논박해보겠다. “편식하는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이 의견의 일부는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편식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당장 주어진 음식들을 전부 다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식 하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모든 음식을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아 직도 내 말을 못 믿겠는가? 모든 반대자들을 조용하게 만들 예시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도중에, 내 친구 데일은 아스파라거스를 먹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혹시 얘는 음식을 싫어하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가 닭구이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그는 닭을 좋아하는데, 닭은 음식이므로, 따라서 그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거 봐라. 편식하는 사람들도 음식을 좋아한다.

이건 사람들이 음식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보여주는 많은 예들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밖 에 나가보면 모두를 위한 음식들이 있다. 햄버거가 좋은 예다. 하지만 햄버거를 싫어한다고 해도, 고려해야 할 다른 음식들이 많이 존재한다: 스파게티, 치킨 너겟, 치즈버거, 씨리얼, 베이컨, 팬케익, 팟파이, 유제품 등. 어떤 사람들은 스타버스트 사탕이나 치즈크래커처럼 조리할 필요도 없는 음식을 좋아한다. 또한 찬 음식이나, 유동식, 부드러운 음식, 딱딱한 음식, 젤리를 채운 음식 같은 것들도 있다. 충분히 열심히 살펴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 하나쯤은 찾게 될 거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본다.

당신도 피자는 좋아하겠지.

사 람들은 음식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음식을 먹는 사이사이에 또 시간을 내어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래서 간식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아무 때나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맛도 좋은 간단한 음식 말이다. 수퍼마켓의 간식 코너는 아주 크고, 선택의 폭도 넓다.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해서 돈 주고 살 것이라는 사실을 수퍼마켓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으며, 당신도 잘 들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 내가 통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한 98%쯤은 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매일 먹을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나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점심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비율은 정말 높을 수밖에 것이다. 그들이 그 시간에 달리 무얼 하겠는가? 아기들조차도 음식을 못 얻어먹으면 울어댄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우리가 실질적으로 음식을 먹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는 증거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그토록 좋아하는 걸 수도 있겠다.

음식은 주변에 늘 있어왔다는 것: 이것은 하나의 팩트다.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에서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에도 음식은 거기에 있었다. 첫 추수감사절 때에도 음식은 거기에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인류가 언제나 해온 바로 그것이다. 음식이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음식이 없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인류라고 부를 수나 있었을까? 우리는 아마도 꽤나 허기가 져 있거나, 아니면 죽어있을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 마음을 열고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진짜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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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리는 왜 패닉하나?

Posted by intherye on 2008년 11월 19일

출처:
http://www.sciam.com/article.cfm?id=why-do-we-panic

우리는 왜 패닉하나?

스트레스에서 두려움을 거쳐 본격적인 공황 장애에 이르는 경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가 당사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소식을 제공한다

할 아르코위츠와 스캇 O. 리리엔펠드 씀.

By Hal Arkowitz and Scott O. Lilienfeld

“퇴근하고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 중이었어요,” 데이빗이 보고했다. “당시 스트레스가 아주 심했죠. 긴장은 했지만 집에 가서 쉬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빠방! 제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았어요. 땀을 흘리고 덜덜 떨었죠. 생각들이 마구 오갔고, 내가 미치거나 심장마비가 오는 건가 걱정이 되었어요. 차를 길가로 빼고 응급실로 데려가 달라고 아내에게 전화했어요.”

데이빗의 공포는 이유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급실 의사는 데이빗(필자 중 한 명인 Arkowitz가 맡았던 치료 환자들 몇몇의 짬뽕)에게, 그가 공황 발작을 겪었던 거라고 말해주었다.
진 단 및 통계 매뉴얼Diagnostic and Statistica Manual(DSM)의 최근 판에서는 공황 발작을, 심장의 두근거림이나, 숨이 가빠짐, 땀 흘림, 떨림, 그리고 미치거나 분별력을 잃거나 죽는 것에 대한 걱정을 수반하는, 강렬한 공포나 격렬한 불안의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인 경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발작은 분명한 자극도 없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더더욱 두려움에 질리게 만든다. 인구 중 약 8에서 10퍼센트가 이따금씩 발작을 경험하지만, 5퍼센트만이 공황장애로 발전한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들 대부분이 때때로 경험하는 것처럼 단순히 걱정들이 쏟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공황 발작을 겪었던 환자들은 전형적으로 그것을 자신이 겪어본 중에 가장 무서웠던 사건으로 묘사한다.

연구를 통해 중요한 진전들이 이루어졌는데, 무엇이 첫 공황 발작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해명은 애초에 발작을 피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스트레스가 치명적 수준까지 차오르면, 아주 작은 양의 스트레스가 더해지는 것으로 발작을 유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발작을 일으킨 사람은 그 사건이 느닷없이 찾아온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패닉 쪽으로 기울어진 유전적 경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심리학자 Regina A. Shih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한 리뷰 글에서 썼다. 그 장애는 가계를 따라 내려오며, 일란성 쌍동이 중 한 쪽이 공황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쪽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유전적으로 덜 비슷한 이란성 쌍동이보다, 두배에서 세배 높아진다. 이러한 발견이 환경 요인을 배제시키진 못하겠지만, 유전적 요소를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공황 장애는 환자들의 삶의 질에 심각한 제한을 가져온다. 환자들은 또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우려로 고통받기도 하고, 관련된 상황을 피하려 하기도 한다. 공황 장애의 진단을 받으려면, 환자는 난처한 상황(말하자면 교실 같은 공공장소)이나, 도움을 얻기 어려운 상황(예를 들어, 주변에 의료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킬까봐도 걱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광범위한 회피를 수반하는 공황 장애에는, 광장공포증이 딸린 공황 장애로 진단이 내려진다. 극단적인 경우 환자들은 꼼짝없이 집에만 묶여있게 될 수도 있다.

정상적인 두려움에서 심각한 공포로

그토록 무력하게 만드는 발작의 근원은 무엇일까? 공황장애 및 관련 장애들을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한 선구적 연구를 해온 보스턴 대학교의 심리학자 데이빗 H. 발로우David H. Barlow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투쟁 도주 fight or flight” 반응이 심박수를 높이고, 실재하는 위험이 없을 때의 “오경보false alarms”(이와 반대로 실재하는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똑같은 반응은 “경보true alarm”라고 한다.)가 숨을 가쁘게 할 때 공황발작을 야기된다고 본다.
우리가 경보나 오경보를 경험할 때, 우리는 그로 인해 당시 나타났던 생물학적 반응과 심리학적 반응을 연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합은 “학습된 경보learned alarms”이 되어 나중에 공황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
외 부 환경과 내부의 신체적 계기(늘어난 호흡수 같은 것)가 둘 다 학습된 경보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하면 공황 발작을 경험하는데, 이는 그러한 생리학적 자극이 공황 발작 때와 유사한 신체 감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단발성 발작만을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본격적인 공황 장애로 진행되는가? 발로우는 그와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종합하여 불안 장애의 통합 이론을 개발했다. 그 이론은 공황 장애로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소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 일상 생활의 사건들에도 과잉 반응을 하게 만드는 불안을 일으키는, 일반화된 생물학적 취약성.
  • (부모의 과잉 보호 같은) 어린 시절의 학습으로 인해, 세상이란 위험한 곳이고, 스트레스는 압도적인 것이라 통제될 수 없다는 불안을 일으키는, 일반화된 심리학적 취약성.
  • 어린 시절에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 위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고 학습하게 되는, 특수한 심리학적 취약성.

이 러한 취약성들을 가진 사람이 장기적인 스트레스와 공황 발작을 경험할 때 공황 장애로 진전된다. 첫번째 발작은 심리학적 취약성들을 활성화시키고, 외부와 내부의 계기에 대한 과민증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약한 자극제를 함유한 약만으로도 발작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있다. 특히 두 가지 발견이 공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안심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모든 공황 발작이 알려진 사건을 통해 유발된다.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것을 앎으로써 예측할 수 없다는 느낌에서 오는 걱정을 덜 수 있다. 둘째, 공황 발작이란 위험의 부재 상황에서 투쟁-도주 반응이 오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움으로써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기초 연구는 우리가 공황 장애를 이해하는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치료법도 마련해주었다. 특히, 발로우와 그의 동료들은, 당신의 불안과 공황의 극복Mastery of Your Anxiety and Panic이 라는 저서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공황 통제 치료에 대해 썼다. 그 치료는 공황 장애에 대한 교육과 공황 발작을 일으키는 내부 및 외부의 단서들로의 다소 점진적인 노출을 통해, 신체 단서들의 파국적 해석을 변화시킴으로써 더 이상 발작을 유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치료법은 대부분의 사례에서 장기적으로 해당 장애에 대한 약물 요법을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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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의 기억

Posted by intherye on 2008년 08월 16일

내용은 흥미로웠다. 초파리 얘기만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는데, ebs 교양 프로 한 편 본 느낌. 중간중간 삽화나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

지난번, 핀치의 부리 에서, 인용들이 어째 나중에 끼워넣은 것처럼 따로노는 듯 싶다 그랬는데, 이 책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글을 쓰다가 관련있는 듯한 내용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그걸 또 그때그때 전부 써버리는 것이 조너선 와이너라는 작가의 스타일인 듯. 읽는 사람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나는 별로였지만.

읽다가 마음에 걸린 부분들을 (오탈자는 빼고) 대충 기록해봤음. 대부분이 번역서의 문제였고, 독서를 방해할 정도로 심하다 싶은 문제들도 종종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상당 부분이 번역자 자신보다도 출판사측의 부실한 검토 문제인 듯. 책에 써있는 출판사 홈페이지(www.eclio.co.kr)에 글을 남길까 했는데, 마땅히 남길 곳도 없기에 걍 이 밑에 달아둔다. (사실 이 책을 출판했었다는 사실을 찾을 수도 없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쪽. 감수자 최재천의 추천사.

내가 김동인의 소설 내용을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사람 발가락이 다 거기서 거기 대충 똑같이 생긴 건데, 그런 발가락을 보고 자기랑 닮았다며 위안을 얻는, 오쟁이진 남자 얘기 아니었나. 흠. 누가 자기랑 미남/미녀 배우가 닮았다고 그러면 “그래.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이 닮았다.”며 놀리듯이.
그나저나 최재천 교수의 글은, 읽을 때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 느낌의 원천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는 연단 위의 교장선생님을 연상케 한다.

갓 태어난 거위 새끼는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자를 보고 왼쪽으로 움직이면 어미 거위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매로 인식한다.어미 거위의 그림자를 보고는 겁을 먹지 않지만 매의 그림자가 싶으면 재빨리 달아난다.
27-28쪽.

목이 길고 꼬리쪽이 짧은 어미 거위, 목은 짧고 상대적으로 꼬리쪽이 긴 매, 따라서 대충 뭐 이렇게 –x- (x는 날개) 생긴 그림자 그림 한 장이라도 넣어줬어야지. 그냥 왼쪽 오른쪽이라고 말로만 설명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임? 나야 딴데서 이 얘기를 그림과 함께 본 적이 있어서 무슨 얘긴지 대충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뭥미 했을 듯. 작가에게, 그림 안넣고 글로만 묘사하는 데에 무슨 강박이 있나 싶음.

기원후 2세기 그리스의 의학자 갈렌(…)
33쪽.

별거 아닌데, 갈렌->갈레노스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그 비밀을 품고 있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셰익스피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1612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 『폭풍우 The Tempest』에서 프로스페로(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작가 자신과 가까운 인물. 모든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의 원형)는 자신의 양자 칼리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악마놈, 그놈은 악마야. 타고난 악마.
아무리 가르쳐도 그놈의 천성은 고칠 수 없단 말야.

34-35쪽.

이건 명백히 번역자의 잘못. 바로 앞에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의 셰익스피어 얘기를 하고 나서 등장하는 인용문인데, 정작 인용된 내용 속에는 본성이나 양육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돼? 앙? 내가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구글로 막 스펠링도 어려운 셰익스피어를 영어로 쳐넣는 고생 끝에 직접 원문을 찾아봤어. “A devil, a born devil, on whose nature Nurture can never stick”이라고 나오네. “악마, 타고난 악마, 그 본성에, 양육이 도통 안 먹히는 놈” 뭐 이런 얘기인 것 같아. 물론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은 이렇게 어거지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전문 문학번역자의 번역을 찾아옮기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단어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인용의 경우엔 최소한 원문을 같이 실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거 아닐까? 읽는 사람 벙찌잖아. 그렇다고 어떤 번역본을 인용했는지 밝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블 벙찜…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
71쪽.

역주에 약간 의문. 선불교 승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라고 하기보다는. 음.

길게 꼬인 분자 사슬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 천문학자들 눈에 비친 행성의 모습이나 20세기 초반 물리학자들이 바라보던 원자의 모습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댈 수도 없는 작은 점일 뿐이었다.
73쪽.

현미경으로 행성 보신 적 있으세요? 본 적 없으면 말도 하지 마세요.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다윈은 런던동물원에서의 실험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나는 런던동물원의 아프리카산 큰 독사 앞에 있는 두꺼운 유리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뱀이 갑자기 달려들어도 절대 놀라서 뒤로 물러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내 결심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뒤로 펄쩍 물러났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이성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험을 상상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14~115쪽.

이건 문제점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했던 비슷한 짓이 떠올라서 재미있길래 기록해둠.
http://intherye.wordpress.com/2006/03/31/injection/
다윈이랑 같은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ㅋㅋㅋ

어느 날 교수회의에서 윌슨이 생태학자를 한 명 더 채용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윌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신이 나갔답니까?”/”무슨 뜻입니까?”/”생태학자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18쪽.

둘 중 하나(아마도 후자)는 왓슨일텐데. 번역하면서 둘 다 윌슨으로 써버리는 실수를 한 듯. 혼자 정신 나간 듯이 자문자답하는 꼴이 됐다.

그는 한 식물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꽃의 속명을 지었다는 사실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더구나 그 꽃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 『내 인생의 추억 Memories of My Life』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 우생학에 대한 간단한 설명 몇 줄과 함께 ‘갈토니아 칸디칸스’의 그림을 조그맣게 삽입했다.
131쪽.

여기서 “그”는 골턴. 역자는 인명과 학명을 한글로 옮길 때 골턴Galton과 갈토니아Galtonia와의 연관성을 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암수가 한 몸인 이 초파리는 그리스어 ‘여성gyne’과 ‘남성andr’을 따서 ‘자웅모자이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174쪽.

‘여성gyne’+남성andr’ = ‘자웅모자이크’ -_- 이 역시 원문 병기가 필요한 부분.

그 명판 위에는 수컷 초파리 다리에 있는 성즐(수컷 초파리의 앞다리에 있는 까만점-역주)의 현미경 사진을 붙였다. 수컷은 성즐을 이용해 암컷에 달라붙는다.
211쪽.

역주가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 까만점 가지고는 암컷은커녕 어디에도 달라붙을 수 없으니. 성즐이라는 것이 그저 까맣기만 한 점 같은 것이 아닐 거라는 걸, 나 같은 문외한도 내용만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어딘가에서 베껴오는 역주라는 삘링…

213쪽 이후에 계속 나오는 ‘피리어드’ 유전자는 158쪽에서 ‘주기period’라고 불렀던 유전자와 같은 것인 듯. 겨우 몇십 페이지 떨어져 있다고 용어통일에 실패하면 찜찜하지.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복제생물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217쪽.

복제생물이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 말이 안 되잖아. 역시 원문 병기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인데 번역자가 홀랑 빼먹었다.

“나는 스물세 번째 호메오박스(초파리의 호메오틱 선택 유전자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염기배열-역주)는 연구하고 싶지 않다.”
309쪽.

또 하나의 있으나마나 한 역주. 龍(용 용). 뭐 이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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