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자연사

거의 웹번역기 돌리듯 제 머리를 굴렸습니다.
스스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텍스트를 번역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폭행위로군요. 슬슬 시간나는대로 비문은 수정하겠습니다. 정신건강을 위해 원문으로 읽으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원문 위치: http://www.foreignaffairs.org/20060101faessay85110/robert-m-sapolsky/a-natural-history-of-peace.html


평화의 자연사
A Natural History of Peace

로버트 M. 사폴스키
By Robert M. Sapolsky

From Foreign Affairs, January/February 2006

요약: 인간은 자신이 독특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다른 영장류들에 관한 연구는 그러한 우리 종의 예외주의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렇다면 영장류학은 전쟁과 평화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불과 몇십 년 전까지 믿어져 왔던 것과 달리, 인간은 폭력 투쟁으로 운명지워진 “살인자 유인원 killer apes”이 아니며, 자기만의 역사를 만들 수도 있다.

Robert M. Sapolsky is John A. and Cynthia Fry Gunn Professor of Biological Sciences and Professor of Neurology and Neurological Sciences at Stanford University. His most recent book is “Monkeyluv: And Other Essays on Our Lives as Animals.”

털없는 유인원
THE NAKED APE

진화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는 이렇게 말했었다. “모든 종들은 독특하다. 그런데 인간은 가장 독특하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의 특별함을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다른 영장류들에 대한 연구는 그러한 인간 예외주의를 점점 더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한 삭감의 일부는 비교적 입맛에 맞았었다. 이를 테면, 우리 신체의 작동과 관련한 것들이 그러한데, 그래서 우리는 이제 비비baboon의 심장이 인간의 신체에 이식되어 몇 주 동안 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인간의 혈액형이 인간과 유사한 혈액 다양성을 가진 붉은털 원숭이rhesus monkey의 이름을 따온 Rh 인자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울 좌절스러운 것은 인지의 영역에서 나타난 연속체이다. 우리는 이제, 예를 들어, 다른 종들도 지역 문화적 차이를 가진 뛰어난 도구를 발명하여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영장류들은 의사소통을 하면서 어떤 언어학자라도 놀라게 할만한 “의미론적 특성 semanticity” (사물과 행동을 지칭하기 위한 상징의 사용)을 여러모로 보여준다. 또한 실험들을 통해 다른 영장류들도 “마음의 이론 theory of mind”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 마음의 이론이란 다른 개체들이 서로 다른 생각과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칭 독특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생활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도전을 받아왔다. 간혹 있는 인간 은둔자처럼, 전형적으로 비사회적인 영장류도 몇 (오랑우탄처럼) 있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어떤 영장류를 그것이 속한 사회집단으로부터 떼어내어 별개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약 150 종에 달하는 영장류 종들 전반에 걸쳐서 평균 사회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두뇌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피질의 비율이 더 커진다. 영장류 두뇌의 가장 희한한 점은, 말하자면, 우리가 수다 떨고, 털 고르고, 협동하고, 속이고, 누가 누구랑 짝짓기하는지에 집착할 수 있게끔 진화에 의해 조각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강렬하고 풍부한 사회적 생활을 영유하는 또 하나의 영장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영장류학이 인간의 사회성에서 보다 중요한 부분-전쟁과 평화-에 관해 우리에게 뭔가 가르쳐줄 수 있는지 여부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야만적으로 폭력적인 영장류라고 생각되었다. 수십년 전 자연 영화들이 끝날 무렵 “우리는 자기 일원을 죽이는 유일한 종”이라고 불길하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는 걸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다른 몇몇 영장류들도 그들의 동료들을 엄청나게 죽인다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그러한 시각은 버려졌다. 수컷들도 죽이고, 암컷들도 죽인다. 어떤 종들은 리차드 3세에 버금가는 냉혈한 계략으로 서로의 영아들을 살해한다. 어떤 종들은 그들의 도구제작 기술을 보다 크고 훌륭한 곤봉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또 다른 몇몇 영장류들은 심지어 전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태-다른 개체군을 향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집단적 폭력-에 임한다.

영장류의 현장 연구가 늘어남에 따라, 가장 놀라웠던 것은 종들 사이에 나타난 사회적 관습의 차이였다. 그렇다. 몇몇 영장류 종들은 잦고 다양한 폭력으로 가득찬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어떤 종들의 삶은 공동체주의, 평등주의, 그리고 협동적 유아 양육으로 가득차 있다.

경향들이 나타났다. 기본gibbon이나 마모셋marmoset처럼 덜 공격적인 종들의 경우, 무리들이 먹이가 풍부하고 살기 좋은 비옥한 우림지대에 사는 경향이 있다. 암컷과 수컷은 같은 몸집이 같은 경향이 있으며, 수컷들은 길고 가느다란 송곳니나 화려한 색채 같은 이차적인 성적 표지가 부족하다. 반면에, 비비baboon나 붉은털원숭이rhesus monkey처럼 폭력적인 종들의 경우, 정반대의 양상이 나타난다.

폭력적인 종들에 관한 가장 불안스러운 사실은 그들이 하는 행동의 명백한 불가피성이었다. 어떤 종들은 그저 원래 그렇게 생긴 것 같았다. 즉, 진화와 생태학의 상호작용으로 고착된 산물,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인간 남성이 완고한 일부다처이거나, 밝은 빨간색 엉덩이와 싸움을 위한 15센티 송곳니를 갖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 종이 온화한 영장류들과 공유하는 공통점 만큼이나 폭력적인 것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본성상”이란 말은 따라서 “우리의 본성상”과 같은 말이 되었다. 이것이 로버트 아드리Robert Ardrey에 의해 유명해진 살인자 유인원으로서의 인간 이론이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화로워질 가능성은 인간에게 쥐는 꼬리가 돋을 가능성과 비슷하다.

그러한 관점에는 항상 영화 혹성탈출 이상의 과학적 엄밀함이 없었는데도, 단지 그 관점을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지 알아내기 위해 엄청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수십년에 걸친 연구 이후, 상황은 꽤 흥미로워졌다. 어떤 영장류 종들은, 그들의 사회구조나 생태학적 조건에 의한 습성상 실제로 단순히 폭력적이거나 평화롭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영장류 종들은 그들의 본성 속에 붙박힌 폭력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오늘날 도전 과제는 어떤 조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또 인간이 스스로 그러한 요령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평화의 화신 보노보
PAX BONOBO

영장류학은, 제인 구달Jane Goodall의 경이적으로 영향을 미친 연구 덕분에 오랫동안 침팬지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녀가 야생에서 수십년에 걸친 관찰로부터 얻은 발견들이 널리 보급되어 왔다. 구달의 연구에 기초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물들은 늘 침팬지들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대목을 포함시키곤 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놀랍게도 98퍼센트나 되는 DNA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의해 강조되는 개념이다. 또한 구달과 다른 침팬지 연구자들은 그들의 연구 대상에게서 끝없이 이어지는 살해, 동족섭식, 조직적인 집단 폭력을 조심스럽게 기록해 왔다. 따라서 인간의 진화적 운명은, 이 첫번째 사촌들의 난폭함에 의해 더럽혀진 채 결정된 듯했다.

하지만 애초에 또 다른 침팬지 종이 있었다. 그 종은 적은 숫자, 멀고 울창한 우림에 있는 서식지, 그리고 그 종의 초기 기록자들이 일본어로 발표했다는 사실 등에 의해, 전통적으로 무시되었다. 이 날씬하고 자그마한 동물들은 원래 “피그미 침팬지”라고 불렸고, 진짜 침팬지의 대수롭지 않은 아종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보노보라고 알려진 그것들은 오늘날 확실히 다른 종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분류학상으로나 유전학상으로나 표준 침팬지만큼이나 인간에게 가까운 친척이다. 게다가 이건 완전히 색다른 유인원이다.

수컷 보노보들은 특별히 공격적이지 않으며, (표준 침팬지처럼) 자주 싸우는 종들에게 전형적인 건장한 체격도 나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보노보의 사회 체계는 암컷 우위이고, 식량은 자주 공유되며, 사회적 긴장을 조정하는 잘 발달된 수단들이 있다. 그리고 바로 섹스가 있다.

보노보의 섹스는 영장류학 학회에서 외설적 볼거리가 되며, 부모들로 하여금 자연 영화를 보는 아이들의 눈을 가리게 만든다. 보노보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세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자세로, 짝을 이루거나 집단으로, 서로 다른 성끼리하거나 동성 간에, 서로 인사를 하거나 화해를 하려고, 무서운 포식자가 떠난 후 열기를 가라앉히려고, 식량 발견을 자축하거나 상대방을 꾀어서 얻어 먹으려고, 아니면 그냥 괜히 섹스를 한다. 시쳇말로, 화성에서 온 침팬지 금성에서 온 보노보다.

보노보 사회에서도 모든 게 완벽하진 않으며, 그들에게도 여전히 위계질서와 충돌이 있다. (아니라면 왜 충돌의 해결수단을 발명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재, 과격한 친척들에게 대항할 훌륭한 해독제로서, 가장 인기 있는 분석 대상 종이다. 문제는, 보노보들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꽤 잘 아는데도,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보노보들이 어떤 것 같은가-에 관한 것으로서, ‘그들의 본성상 그런 것’ 고전적인 사례이다. 보노보에게 (침팬지에게는 없는) 어떤 유전적 요소가 있어서, 어떤 유전자 변형이 수컷들로 하여금 친밀 행동(집단 단결을 증진하는 행동)을 더 좋아하게 만든다는 최근의 증거도 있다. 그렇게 놀라운 종(또한 당연하게도, 멸종의 위기에 몰린 종)이다. 하지만 ‘우리는 침팬지다’ 운명론자들의 영향력을 몰아내는데에 유용하다는 것 말고는, 보노보들이 우리에게 해줄 말은 거의 없다. 우리는 보노보가 아니며, 절대 될 수도 없다.

전사들, 등장하다.
WARRIORS, COME OUT TO PLAY

보노보의 사회 생활과 대조적으로, 침팬지의 사회 생활은 즐겁지 못하다. 붉은털 원숭이rhesus monkey들도, 초원 비비savanna baboon-아프리카 초원에서 50에서 100마리의 무리로 발견되는 종이자, 필자가 거의 30년 간 연구해온 종-도 마찬가지다. 비비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엄격하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인 듯하다. 수컷들 사이에서, 높은 서열은 일반적으로 일련의 성공적인 폭력적 도전을 통해 성취된다. 고기와 같은 노획물들은 고르지 않게 분배된다. 대부분의 수컷들은 폭력의 결과로서 죽고, 거의 절반의 공격이 제삼자를 향한다. (어떤 높은 서열의 수컷이 기분이 나쁘면, 곁에 있는 죄없는 암컷이나 아래 서열의 수컷에게 분출한다.)

수컷 비비는, 더군다나, 놀랍도록 치사하게 싸울 수도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내가 연구하는 무리들 중 하나에서 이런 걸 보았다. 두 마리의 수컷이 싸웠는데, 그 중 하나가 심하게 얻어 맞아서, 엉덩이를 공중에 쳐든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이 자세는 초원 비비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싸움의 끝을 알리는 비굴한 복종의 제스쳐로 통하며, 승리한 수컷의 통상적 반응은 패자에게 의식화된 지배 행동(이를 테면 올라타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례에서는, 승자가, 패자에게 마치 올라탈 것처럼 다가가더니, 올라타는 대신 갑자기 송곳니로 깊숙히 물어버렸다.

비비 집단은, 말하자면, 평화주의자에게는 적당한 환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흥미로운 예외들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예를 들어, 한가지 전통적인 스타일의 자신감 넘치던 진화적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알려져 왔다. 그 표준 논리에 따르면, 수컷들은 높을 서열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서로 공격적으로 경쟁한다. 높은 서열은 그들로 하여금 번식에서 우위를 차지하여, 다음 세대에 전달될 그들의 유전자 사본 수를 최대화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비비들 사이의 공격이 실제로 높은 서열을 달성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다. 지배적 수컷들이 특별하게 공격적인 경우는 드물며, 공격적인 경우는 대개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경우이다. 무언가를 이용해야 하는 자는 그것을 잃으려는 자인 법. 그 대신에, 우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사회적 지능과 충동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중한 제휴를 형성하고, 하급자에게 관용을 보여주고, 대부부의 도발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최근의 연구는, 더군다나, 암컷들도 어떤 수컷이 자기 유전자를 물려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은 번식의 “선형 접근linear access” 모델-암컷 한 마리가 발정기이면, 우두머리 수컷이 짝짓기하고, 두 마리가 발정기면, 우두머리 수컷과 서열 두번째 수컷이 기회를 얻고, 하는 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암컷 비비들이 원하기만 하면 수컷-수컷 경쟁의 승자들로부터 꽤 달아날 수 있고,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다른 수컷과 함께 숨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수컷이 실제로 원해질까? 일반적으로, 그것은 바로 암컷들과 친밀한 관계를 성립하기 위해 다른 전략-더 자주 털을 골라주고, 새끼들 돌보는 것을 도와주고, 두들겨 패지 않는 전략-을 따라온 수컷이다. 이들 멋쟁이 수컷들은 적어도, 자기보다 더 공격적인 동료들만큼이나 많은 유전자 사본을 전달하는 듯하며, 이것은 특히 그들이 생명을 단축시키는 검투사들의 탈진과 부상 없이 다년간 그렇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화적 성공을 향한 단독 노선으로서의 싸움이라는 조야한 묘사는 틀린 것이다. 보통의 수컷 비비는 전투적 노선을 고르지 않고, 살아가면서 공격성이 사회적 지능과 억제보다 덜 중요한 시기들이 있으며, 진화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대안적 행동방침들이 있다.

수컷끼리 싸워대는 맨주먹 세상 안에서조차, 우리는 이제 영장류의 예절에 관한 놀라운 전초기지들을 알아보고 있다. 우선, 영장류들은 싸운 다음 화해할 수 있다. 그러한 화해는, 1980년대 초 에머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의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에 의해 최초로 기술되었는데, 오늘날까지 수컷 침팬지들을 포함하여, 대략 27 종의 서로 다른 영장류에게서 관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그것이 작용해야 하는 방식대로 작용한다. 즉, 싸웠던 당사자들 사이에 더 심한 공격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인다. 또한 다양한 영장류들이, 수컷 비비들을 포함하여, 가끔 협동을 예를 들어 싸움에서 서로를 지원함으로써 혐동을 하곤 한다. 연합은 호혜주의를 수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정의나 공정에 대한 지각 같은 것을 유발할 수 있다. 드 발과 그의 학생 한 명의 주목할만한 한 연구에서, 카푸친 원숭이들capuchin monkey이 인접한 우리에 수용되었다. 원숭이 한 마리는 (음식물 쟁반을 자기 우리 쪽으로 당김으로써) 스스로 음식을 구할 수도 있었고, (더 무거운 쟁반을 함께 당김으로써) 이웃의 도움을 받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원숭이들 중 오직 한 마리만 문제의 음식물에 접근할 수 있었다. 협동했던 원숭이들이 더 이웃과 음식물을 공유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형성하는 듯한, 수컷 침팬지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생에 걸친 협동의 양상이다. 어떤 영장류 종들 중에는, 한 쪽 성의 모든 구성원들이 성숙기에 이르면 태어난 무리를 떠남으로써, 유전적으로 유해한 근친교배의 가능성을 피한다. 침팬지들 중에서는, 암컷들이 고향을 떠나며, 결과적으로, 수컷 침팬지들은 일반적으로 가까운 수컷 친척들의 무리 속에서 삶을 보내게 된다. 게임 이론에 빠진 동물 행동학자들은 친척이 아닌 동물들 사이에서 어떻게 호혜적 협동이 시작되는지 알아내려고 일생을 소비하고 있지만, 친척들 사이에서는 안정적인 호혜주의가 쉽게 나타난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폭력적인 영장류들조차 어떤 지점까지나마 화해와 협동에 임한다. 우선, 보노보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애초에 폭력과 충돌이 없다면 화해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화해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서, 이를 테면 암컷 초원 비비들은 화해를 잘하는 반면 수컷들은 그렇지 못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해를 실제로 하는 종이나 성 내부에서조차, 화해는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개체들은 자기에게 유용할 수 있는 녀석들과 더 화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콜럼비아 대학교Columbia University 마리나 코즈Marina Cords의 탁월한 연구에 의해 보여졌는데, 그 연구에서 한 종류의 마카크 원숭이들 사이의 어떤 관계의 가치가 인위적으로 높여졌다. 여기서도 동물들은, 혼자 또는 협동을 통해 먹이를 얻을 수 있는 조건하에 서로 이웃한 우리에 갇혔는데, 협동하지 않은 것들에 비해 협동할 능력을 개발한 짝들이 야기된 공격에 대해 세 배나 많이 화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긴장을 감소시키는 화해는, 다시 말해서, 이미 협동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계속 그렇게 할만한 동기를 가진 동물들 사이에서 가장 잘 일어나는 듯하다.

연합이 불안정하기로 악명높다는 사실처럼, 협동에 대한 연구에서도 김 빠지는 대목들은 나타난다. 내가 1980년대 초기에 연구했던 한 무리의 비비들에서는, 수컷-수컷 연합이 파경에 이르기까지 평균 이틀도 걸리지 않았으며, 그러한 파경의 대부분에서 한 쪽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거나, 혹은 보다 극적으로 싸우는 도중에 다른 편으로 넘어가버렸다. 결국, 가장 낙담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연합의 목적이다. 이론 상으로는, 협동은 식량 채집을 개선하거나 포식자를 막아줌으로써 개체주의에 승리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두 마리의 비비는 일반적으로 가련한 제 삼자를 만들기 위해 협동한다.

구달은 동족의 수컷 침팬지 무리들이 협동적 “경계 순찰border patrol”을 수행한다는 심히 걱정스러운 사실을 보고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경계순찰이란 다른 그룹으로부터 그들을 갈라놓는 지리적 경계를 따라 탐색하면서 마주치는 이웃의 수컷들을, 심지어 다른 집단들을 전부 죽여 없애버릴 때까지 공격하는 것이다. 집단내 협동은 이처럼 평화와 평안보다는 오히려 보다 효과적인 박멸을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가장 공격적이고 계층화가 심한 사회 체계를 가진 축에 속한 영장류 종들이 협동하고 충돌을 해결하는 것을 보아왔다. 비록 일관적이지도 못하고, 반드시 상냥한 목적에 기인한 것도 아니며, 어떤 비홉스적인 사회적 성과로 이끌어주는 점진적 방식도 아니기는 하지만. 여기서 교훈은, 폭력적인 영장류들이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들 종의 본성이 이전에 생각되어온 것보다 더 미묘하고 다면적이라는 점인 듯하다. 최소한 그것이, 꽤 최근까지의 교훈이었다.

고루한 영장류와 새로운 재주
OLD PRIMATES AND NEW TRICKS

어느 정도는, 오래된 “본성 대 양육 nature versus nurture” 논란은 멍청하다. 유전자의 작용은 처한 환경과 완전히 얽힌다. 어떤 점에서는, 유전자 X가 무엇을 하는지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며, 그 대신 유전자 X가 환경 Y에서 무엇을 하는지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요인에만 기반하여 어떤 유기체의 행동을 예측해야만 한다면, 가장 쓸모있는 요인이 유전학과 관련한 것이 될 지 아니면 환경과 관련한 것이 될 지 여전히 알고 싶을 수 있다.

영장류들이 어느 정도는 그들의 “본성”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최초의 두 연구에서, 교차 입양cross-fostering이라 불리는 행동 유전학의 고전적 기법이 사용되었다. 어떤 동물이 수세대에 걸쳐 특정한 행동을 보인다고 치고, 그것을 행동 A라고 부르자. 우리는 그 행동이 공유된 유전자 때문인지 아니면 다세대간에 공유된 환경 때문인지 알고 싶다. 연구자들은 그 동물을 교챠 입양함으로써 그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즉, 태어나자마자 그 동물의 생모를 바꿔치기 하여 행동 B를 가진 어미에 의해 길러지게 한 후, 자라났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알아보려고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의 한 가지 문제점은 어떤 동물이 속한 환경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태아는 어미와 매우 친밀한 환경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몸의 순환체계, 뇌 기능과 행동에 평생에 걸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온갖 호르몬과 영양소 등등. 따라서, 이 접근은 비대칭적으로만 적용될 수 있다. 어떤 행동이 새 환경에서도 나타난다면, 유전자가 원인이라고 결론내릴 수 없으나, 새 환경에서 행동이 변화한다면, 유전자가 원인이 아니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두 연구의 출발점이다.

1970년대 초, 한스 쿰머Hans Kummer라는 이름의 매우 존경받는 영장류학자가 이디오피아Ethiopia의 한 지역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현저하게 다른 사회 체계를 가진 두 종의 비비baboon가 살았다. 초원 비비savanna baboon은 많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진 큰 무리를 지어 살았다. 나무 비비hamadryas baboon는, 그와 대조적으로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회를 가지고 있다. 훨씬 가혹하고 매마른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무 비비는 독특한 생태적 문제를 가진다. 어떤 자원들, 이를 테면 드문 물 구멍이나 밤에 포식자를 피해 잠을 자기 좋은 절벽면 같은 것은 단일하고 희귀하다. 그리고 많은 수의 동물들이 그것들을 공유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이 먹는 식물 같은 다른 자원들은 드문드문 널리 퍼져 있어서 동물들로 하여금 작고 분리된 집단들로 기능할 것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나무 비비들은 소수의 암컷들과 자녀들로 둘러싸인 한 마리의 수컷으로 이루어진 “하렘” 구조를 진화시켰는데, 그 하렘들은 가끔씩 들러야 하는 물구멍이나 절벽면에서 잠깐씩 평화롭게 병합된다.

쿰머는 간단한 실행을 수행했다. 다 자란 암컷 초원 비비를 사로잡아서 나무 비비 무리 속에 풀어주었고, 다 자란 암컷 나무 비비를 사로잡아서 초원 비비 무리 속에 풀어주었다. 나무 비비들 사이에서는, 수컷이 암컷을 위협할 경우, 그 수컷은 분명 하렘을 지배하고 있는 바로 그 짐승일 것이고, 암컷이 부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를 테면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초원 비비들 사이에서는, 수컷이 암컷을 위협할 경우, 그 암컷이 부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다. 쿰머의 실험에서, 다른 종 사이에 떨궈진 암컷들은 초기에 새 이웃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실수가 될 그들 종의 전형적인 행동을 나타냈다. 하지만 점차, 그들은 새 규칙에 동화했다. 이것을 배우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대략 한 시간. 다시 말해서, 유전적 차이가 두 종을 가르는 데에는 수천 년, 각각의 암컷이 중요한 사회 규칙을 익히는 데에는 꼬박 한 평생, 그리고 과정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데에는 그토록 보잘 것 없는 시간이 걸릴 뿐이다.

두번째 실험은 드 발과 그의 학생 데니스 요하노비츠Denise Johanowicz에 의해 1990년대 초기에 마카크 원숭이 두 종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어떠한 인간적 기준으로 보아도, 수컷 붉은털 마카크 원숭이rhusus macaque는 호감이 가지 않는 동물들이다. 그들의 위계질서는 엄격해서, 정상에 있는 놈들이 먹이의 불균형한 분량을 가로채며, 흉포한 공격성으로 이러한 불평등을 강제하고, 싸운 뒤에는 거의 화해하지 않는다. 붉은털 마카크 원숭이 사촌들과 거의 모든 유전자를 공유하는, 수컷 짧은꼬리 마카크 원숭이stump tail macaque는, 대조적으로, 훨씬 적은 공격성, 더 많은 친밀 행동, 느슨한 위계질서, 그리고 더 많은 평등주의를 보인다.

사로잡힌 영장류들을 연구하면서, 드 발과 요하노비츠는 붉은털과 짧은꼬리가 함께 섞인 어린 마카크 원숭이들로 이루어진 혼성 사회 집단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붉은털 마카크 원숭이들이 짧은꼬리 원숭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몇 달이 흐른 뒤, 붉은털원숭이 수컷들은 짧은꼬리 원숭이들의 사회 양식을 받아들여, 마침내 짧은꼬리원숭이들이 높은 비율로 보이는 화해 행동과 같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더군다나, 하필이면 짧은꼬리원숭이들과 붉은털 마카크 원숭이들이 화해할 때 서로 다른 몸짓을 사용한다. 연구에서 붉은털 마카크 원숭이들은 짧은꼬리 원숭이들의 화해 몸짓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종 특유의 몸짓을 보이는 예가 늘어났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단순히 짧은꼬리 원숭이들의 행동을 따라한 것이 아니라, 잦은 화해의 개념을 자기들의 사회적 관습에 통합시킨 것이다. 이 새롭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붉은털 원숭이들이 붉은털 원숭이들로만 이루어진 큰 집단으로 돌려보내졌을 때에도, 그들의 새 행동 양식은 지속되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질문을 한 가지 던진다. 그 붉은털 마카크 원숭이들이 붉은털원숭이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옮겨졌을 때, 그들은 그들의 식견과 행동을 남들에게 전파했을까? 애석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마지막 사례로 가봐야 하겠다.

남겨진 것
LEFT BEHIND

1980년대 초, 내가 수년간 연구해오던-거의 함께 살다시피 했던- 초원 비비 집단인 “숲 무리Forest Troop”는 케냐Kenya의 국립공원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이웃한 비비 집단에게 복이 터졌다. 그 집단의 영역에 있던 관광객 숙소가 사업을 확장하여 많은 양의 음식물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지게 된 것이다. 비비들은 잡식성이라 “쓰레기 하치장 무리Garbage Dump Troop”는 버려진 드럼채, 반쯤 먹다만 햄버거, 초콜릿 케익 쪼가리, 그리고 거기 있던 무엇이든 가지고 신나게 잔치를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 구덩이 바로 위에 있는 나무로 옮겨 자면서, 그 날의 쓰레기가 쏟아지는 시간에 딱 맞추어 내려오게 되었다. (그들은 풍부한 식사와 운동 부족으로 곧 꽤 비만이 되긴 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그러한 전개는 숲 무리의 사회적 행동에 거의 극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매일 아침, 약 절반에 달하는 수컷 성체들이 쓰레기 하치장 무리의 영역에 침입해서는, 그 날의 쓰레기가 쏟아지는 시간에 구덩이에 달려들어 쓰레기에 대한 접근권을 놓고 현지의 수컷들과 싸워댔다. 이렇게 했던 숲 무리의 성체들은 두 가지 특징을 공유했는데, 유별나게 전투적이었다는 것(그것은 다른 비비들로부터 음식을 빼앗기 위해 필요한 특성이다.)과, 사회화하는 데에 그리 흥미가 없었다는 것(습격은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그 시간은 대부분의 초원 비비들이 날마다 다같이 털고르기를 하는 시간이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인간 영장류들에게 엄청난 속도로 전염되는 무서운 질병인 결핵이, 쓰레기 하치장 무리들에게서 발병했다. 그 다음 해까지, 쓰레기 하치장 무리의 대부분이 죽었고, 하치장을 습격하던 숲 무리의 수컷들도 전부 죽어버렸다. [각주 #1 참고] 결과적으로 숲 무리에는 평균보다 덜 공격적이고 더 사회적인 수컷들이 남겨졌고, 암컷 대 수컷 비율이 두 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사회적 추이는 극적이었다. 숲 무리 수컷들 사이에 위계질서는 남았지만 전보다 훨씬 느슨했다. 다른 더 전형적인 초원 비비 집단들과 비교했을 때, 높은 지위의 수컷들은 낮은 지위의 수컷들을 거의 괴롭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먹이를 두고 다투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공격은 덜 빈번했으며, 특히 제삼자들에게 그러했다. 그리고 수컷과 암컷들이 서로 털을 골라주거나 함께 앉아있는 것과 같은 친밀 행위의 빈도가 치솟았다. 심지어, 때때로 수컷 성체들끼리 서로 털을 골라준 사례들도 있었는데, 이것은 거의 비비들에게 날개가 돋았다는 것만큼이나 전례 없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사회적 환경은 단지 왜곡된 성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영장류학자들이 가끔 비슷한 성비로 이루어진 무리들을 보고하곤 했으나, 비교할만한 사회적 환경은 없었다. 열쇠가 되는 것은 암컷들의 우세가 아니라 남아있는 수컷들의 유형이었다. 진화 생물학자들이 “선택적 병목selective bottleneck”이라고 부르는, 인구 통계학적 재앙이,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한 무리의 초원 비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일은 몇 년 후에야 일어났다. 암쿳 초원 비비들은 태어난 무리에서 일생을 보내는 반면, 수컷들은 성숙기 무렵에 태어난 무리를 떠나기 때문에, 한 무리의 수컷 성체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자라 젊을 때 들어온 것이다. 1990년대 초까지, 숲 무리의 결핵시기에 있던 원래의 저공격/고친밀 수컷들 중 하나도 살아있지 않았으며, 그 무리의 모든 수컷 성체들은 전염병 이후에 합류했었다. 이런데도, 그 무리의 독특한 사회적 환경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선택적 병목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다른 곳에서 자라나 숲 무리에 들어온 젊은 수컷들이 결국에는 현지의 수컷들의 행동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류학자들과 동물 행동학자들 양쪽에게 정의된 바와 같이, “문화”란, 비유전적이고 비생태적인 이유로 일어나며, 창시자의 시절을 넘어서 지속되는, 국지적인 행동의 차이로 이루어진다. 숲 무리의 저공격/고친밀 사회는 바로 다세대에 걸친 온화한 문화와 다름 없다.

그 무리에 대해서 계속된 연구는 그것의 문화가 어떻게 신참들에게 전해지는지에 관한 통찰을 제공해 왔다. 유전학은 확실히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으며, 자가 선택self-selection도 분명히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 즉 그 무리로 옮겨온 젊은 수컷들은 다른 무리로 옮겨간 수컷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서, 처음 왔을 때에는 비슷하게 높은 공격성과 낮은 친밀 빈도를 보인다. 현지 개체들이 새로 온 수컷들에게 온화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가르친다는 증거도 없다. 어떤 관찰학습이 일어나고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이 문화의 특징적 성향이 독특한 행동의 수행이 아니라, 전형적 행동 수행이 비전형적으로 극단적인 비율로 나타나는 것이라 감지하기가 어렵다.

현재까지, 매개의 기제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실마리는 최근에 옮겨온 수컷들이 원래 살던 암컷들에 의해 다뤄지는 방식이다. 전형적인 초원 비비 무리에서는, 새로 온 젊은 수컷들은 사회 조직에 끼어드느라 고생스럽게 몇 년을 보낸다. 즉, 그들은 지위가 매우 낮고, 암컷들에게 무시당하며, 수컷 성체들에게는 공격성의 손쉬운 대상으로서만 주목받는다. 숲 무리에서는, 대조적으로, 새로 온 수컷들은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밀려드는 암컷들의 친절에 휩싸인다. 현지 암컷들은 새로온 수컷들이 온지 평균 18일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성적으로 접근하며, 도착하고 평균 20일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새로 온 수컷들의 털을 골라준다. (보통 초원 비비들은 그러한 행동을 각각 63, 78일 지났을 때 보인다.) 게다가, 이러한 환영하는 몸짓은 이주 후 초기 기간 중, 숲 무리에게서 더 빈번하게 발생하며, 숲 무리의 암컷들이 수컷들의 털을 고르는 것도 다른 곳보다 네 배나 많다. 거의 도착한 그 순간부터, 말하자면 새로 온 수컷들은, 숲 무리에서는, 사정이 다르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으로서, 내 생각에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이 무리의 특별한 문화가 능동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행동에 촉진되어 단순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수의 절반인 데다가 괜찮은 녀석들이기까지 한 수컷들을 가진 무리에 살면서, 숲 무리의 암컷들은 더 태평해지고, 덜 조심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새로 온 녀석들이 처음에는 전형적으로 어리석은 젊은 놈들일지라도 일단은 사회적으로 접촉하려 하게 되었다. 그러면, 새로 온 수컷들은, 자기가 아주 잘 대접받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어, 마침내 긴장을 풀고 그 무리의 독특한 사회적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고난 살인자들?
NATURAL BORN KILLERS?

여기에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에 적용될 수 있는 배울만한 교훈이 뭐가 있을까? 폭력적인 사람들이 결핵 같은 죽을 병에 걸리기를 바라는 것은 빼고 말이다.

인간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생물학적 인류학자들은, 정착된 전통에 따라 인류 역사의 99 퍼센트 동안 사람들이 혈연인 수렵 채집인들로 이루어진 작고 안정된 무리에 살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게임 이론가들은 작고, 단결된 집단이 협동의 출현하기에 완벽한 환경이라는 것을 보여 왔다. 즉, 다른 참가자들의 신원이 알려지고, 게임을 여러번 반복할 기회가 생기며(따라서 사기꾼들을 벌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공개된 참여가 생긴다(참가자들이 명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 수렵 채집인 무리들은 고도로 평등주의적일 것이다.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데이터들은, 작은 협동의 장점들을 인류의 반대쪽 극단, 즉 기업 세계에서도 보여왔다.

하지만 작은 집단 내에서의 폭력의 결핍은 커다란 대가를 치뤄야 할 수 있다. 가치관을 공유하는 작고 동질적인 집단들은 복종이라는 악몽이 될 수 있다. 외부인들에게 위헙해질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가까운 친척들인 수컷 침팬지들의 살인적인 경계 순찰을 따라하듯, 군대들은 역사 속에서 늘 작고 안정적인 단위를 형성하고자 해왔다. 즉 그들에게 가짜 혈족 관계의 관습을 심어주어, 결과적으로 효율적이며 협동적인 살인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반사적으로 외부인들을 타자the Other로 보게 하지 않으면서 작은 집단의 협동적 장점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한 가지 방법은 교역을 통해서이다. 자발적인 경제적 교류는 이익을 산출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마찰을 감소시킬 수 있다. 마카크 원숭이들이 음식물을 획득하는 데에 중요한 동료들과 더 화해하려고 함으로써 보여줬듯이 말이다.

또 다른 방법은 분열-융합 사회 구조fission-fusion social structure를 통한 것이다. 그 구조에서 집단들 사이의 경계들은 절대적이지 않고 드나들 수 있다. 여기서 모범은 하마드리아 나무 비비들의 다층 사회가 아니다. 그들의 기본 사회 단위인 하렘은 독재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융합은 단지 자원을 평화롭게 이용하기 위해 많은 동물들이 때때로 모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 수렵 채집인들이 따를 만한 더 나은 예이다. 거기서는 작은 무리들이 자주 합쳐졌다가, 갈라졌다가, 잠시 구성원들을 맞바꾸곤 하는데, 그러한 유동성은 환경 자원 문제를 해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 결과물은 자기 집단과 적들만이 있을 뿐인 수컷 침팬지들의 모 아니면 도all-or-nothing 세상이 아니라서, 수렵 채집인들은 넓은 지역에 걸쳐 뻗어 있는 친교와 협동의 점이 지대를 즐길 수 있다.

수렵 채집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다른 네트워크들의 상호작용을 닮았다. 각각의 노드들(이 경우, 작은 집단들)이 있고, 노드들 사이의 상호작용 중 다수는 국지적인 것이며, 상호작용의 빈도는 거리에 따라 떨어진다. 수학자들은 짧은-, 중간-, 먼-거리 상호작용의 비율이 최적일 때, 네트워크가 견고해진다는 것을 보여왔다. 즉, 국지적 상호작용을 하는 매우 협동적인 무리들이 우세하지만, 덜 빈번한, 먼-거리 소통과 조화라는 잠재력을 유지한다.

수렵 채집인 네트워크의 분열-융합 상호작용을 최적화하는 것은 쉽다. 무리 안에서는 협력하고, 바로 이웃 무리와 합동 사냥을 자주 기획하고, 종종 꽤 멀리 떨어진 무리들과 사냥을 함께 하고, 지구 끝에 있는 신화적 무리와 한번의 공동 사냥을 했던 전설을 가지면 된다. 오늘날의 인간 네트워크에서 분열-융합 상호작용을 최적화하는 것은 대체로 어렵지만, 원리들은 똑같다.

이 주제들을 탐구하다 보면, 인간도 영장류들처럼 외국인 혐오xenophobia가 굳어져 있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한 비관주의와 종종 마주치게 된다. 몇몇 뇌 영상brain-imaging 연구들이 매우 낙담스럽게도 이러한 관점을 지지해주는 듯하다. 뇌 깊숙히 편도체amygdala라고 불리는 구조물이 있는데, 공포와 공격성에 중심 역할을 한다. 실험에서 피험자가 다른 인종 사람의 얼굴을 제시받았을 때, 편도체의 신진대사가 활성화되었다. 즉, 흥분하고, 경계하고, 행동을 취할 준비를 했다. 이것은 얼굴이 “잠재적으로subliminally”, 다시 말해서, 피험자가 의식적으로 보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르게 제시되었을 때에도 일어난다.

하지만 더 최근의 연구들이 이러한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겠다.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많이 경험해본 사람을 시험해보면, 편도체는 활성화하지 않는다. 또한, 프린스톤 대학Princeton University의 수잔 피스케Susan Fiske가 행한 경이적인 연구에서처럼, 사람들을 집단의 성원이 아니라 개인으로 생각하게끔 사전에 피험자들을 편향시켰더니, 편도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타자에게 날카롭게끔 굳어져 있을 지도 모르지만, 누가 타자에 속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분명히 뒤바꿀 수 있다.

1960년대 초, 영장류학의 떠오르던 스타, 하바드 대학Havard University의 어븐 드보어Irven DeVore는 그 주제에 대한 첫번째 전체적인 개관을 출간했다. 그 자신의 전공인 초원 비비들을 논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비비들은 “포식자에 대한 방어로서 공격적인 기질을 얻었고, 공격성은 수도꼭지처럼 틀거나 잠궈질 수 없다. 그것은 그 원숭이의 성격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매우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그들을 모든 상황에서 잠재적인 공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초원 비비들은, 말 그대로, 공격적이고, 계층화가 심하며, 수컷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삶의 교과서적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수 년 동안, 그 종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사회를 비비 천국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행동적 가소성을 보여줬다.

이십 세기의 앞쪽 절반은 독일과 일본의 공격으로 쏟아진 피에 젖어 있었으나, 불과 수십 년 뒤 이 두 나라보다 더 평화적이기를 생각하기란 어려워졌다. 스웨덴은 십칠 세기 내내 유럽을 휘젓고 다녔지만 오늘날에는 평온함을 길러내는 것의 상징이다. 인류는 작은 유목 무리와 대륙적 초국가를 발명했으며, 전자에서 쫓겨난 후손들이 후자에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유연성을 보여 왔다. 우리에게는 다른 표유동물들의 짝짓기 체계를 결정짓는 것과 같은 생리학적이거나 해부학적인 표식이 없지만, 일부일처, 일부다처, 일처다부에 기반한 사회들을 발견했다. 또한 우리는 폭력적 행동이 천국으로 가는 입장권이 되는 종교들과, 같은 행동으로 지옥에 가게 되는 종교들을 만들어 왔다. 평화롭게 공존하는 인간 숲 무리의 세상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본성을 넘어서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에 대해 너무 조금밖에 모르는 것이다.

[각주 #1] 상당한 추적 끝에 그 질병이 쓰레기 더미 속에 있던 썩은 고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부패한 육류 감시관 덕분에 여행자 숙소로 팔렸던 것이었다. 그 연구들은 야생 영장류 집단에서 일어난 이런 종류의 발병에 대한 첫번째 것이었으며, 인간이나 사로잡힌 영장류에서와는 달리, 결핵이 동물에서 동물로 전염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 병이 쓰레기 먹는 놈들에게서 숲 무리에게까지 퍼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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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자연사”에 대한 8개의 생각

  1. 동물학, 생물학, 유전학, 인류학, 심지어 물리학 등에서 속속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인간 중심주의적인 편견이나 사상이 계속 깨져나가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철학을 (깨작깨작 혼자서) 공부하다보면 그런 부분에서 의아한 느낌이 계속 들더군요.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모두에서. 그렇다고 옛날 문헌 공부를 게을리 할 수도 없고… 이럴 땐 어쩌죠? 철학도로서 한 말씀 해 주시구랴.

  2. t/ 저도 대체 이 수소폭탄과 달착륙의 시대에 만물이 물이라느니 내 머릿 속에 송과선이 있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시간내어 읽을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었는데요. 아직도 갈 길이 먼데, 겨우 지난 이천오백 년 지나온 길을 슬쩍 훑어보기만 하는 데에도 일생이 함몰되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명 짧고 머리 나쁜 종족의 비애죠 뭐. 흑흑..

    각설하고, 뻔한 얘기지만, (문헌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옛날 문헌들은, 1) 잘 모르던 시절로 퇴행하지 않기 위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사적 자료로서, 2) 생각에 끊임없이 영감과 기쁨을 불어넣어 주는 일종의 문학예술로서 기능한다고 생각해요.

    1)이라고 해서 당시 저작들을 낮춰 볼 필요가 없는 게, 당시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의 결실인지라 뭐랄까 지금 와서 되돌아보며 “그땐그랬지” 흐뭇해 하는 재미가 있구요. 2)는 어떤 신화나 소설만큼이나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경우죠.

    그리고 이건 별로 근거 없는 희망사항이긴 한데, 과학을 철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볼 필요도 없는 것이, 중세시대 사제들이 중요한 철학자로 다뤄지며 철학개론서에 줄줄이 실려있듯, 언젠가는 뉴튼과 다윈은 물론 그 후예들도 그런 식으로 다뤄지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지만,) 전통철학의 각분야를 깨부수고 있는 바로 그 과학자들이 사실은 우리 시대의 최첨단 철학자들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옛 문헌을 읽는 것과 같은, 철학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배경으로서 알아두면 매우 좋은 교양 같은 거구요.

  3. 이건 좀 곁가지 이야기인데…

    중세철학이 철학사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근대이후 현재에 이르는 철학에서 정말 중요한가요? 정말 종교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런 엉뚱한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1) 개인적으로 제도화된 모든 종교에 대해서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에 일단 들여다보는 일조차 싫고 (2) 서양철학개론 등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다음에 곧바로 데카르트로 뛰잖아요. 거의 모든 교과서가 그렇더군요. 만약 중세종교철학이 정말 사적 의미를 뛰어넘어서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면 그런 식으로 다루지는 않을텐데요.

  4. t/ 뭐 가슴 깊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까지야 있으려나요. 요즘에도 신학 쪽에서는 당시 희한한 철학의 전통을 아직도(!) 이어가는 듯하지만 그거야 걔네들 얘기구요. 다른 것들도 대개 그렇듯이, 그땐 그런 얘기가 오갔구나 하면 되겠죠.

    그나저나 제가 본 개론서에는 있던데요;;; (학교가 미션스쿨이라 그런가;;;) 하다못해 러셀(!)이 쓴 책에조차.. 음;;;;

    저 역시 제도화된 종교들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좀 편향된 답변일 수밖에 없겠으나, 솔직히 제가 중세철학 부분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감상은 주로 안습..이긴 합니다. –; 뭐랄까, 그 최고로 머리 좋은 사람들이 알고자 했던 것과(진리), 그렇다고 고쳐쓸 수는 없었던 것(교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엔 분열해버리는 게, 미쳐버리는 게 느껴져요. (그러나 그 시대라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지금 우리에게도 의식되지 않는 천장이 하나도 없는 걸까요. 좀 더 너그러워져도 크게 나쁠 건 없을 듯..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하는 말 중에도 건질 게 있긴 있는 듯합니다. 1) 우선 아시다시피 진리탐구에 종교 따위를 전제하면 어떻게 되고 마는지 처절한 반면교사 역할을 하겠구요. 2) 비록 천장 아래서였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 안에서는 펄떡펄떡 뛰었던지라 놓칠 수 없는 얘기들도 나오곤 했습니다. 종교색만 좀 필터링하면 아주 훌륭한 사람들도 있죠. (저는 사실 그 이유를 주로, a종교가 지식을 독점했고, b또 그런 시대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라고 삐딱하게 보긴 하지만.. –;) 3) 사적 의미로도, 플라톤이 어떻게 해서 데카르트로 다시 이어지는지 그 중간과정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로서는 훑어볼만 하겠죠. 신을 찾느라고, 본의 아니게 나중에는 신을 벗어던지게 도와줄 도구를 갈고 닦았다고 볼 수도 있겠고..

    세 줄 요약: 개론서 등을 통해 흐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지만, 신학을 전공하거나 중세철학사를 세부전공하지 않는 이상 굳이 원저작물들까지 찾아 읽을 이유는 거의 없을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5. 핑백: decadence in the r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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