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히

1화를 보고 이게 뭘까 어리둥절해 하다가, 2화부터 13화까지 눈알이 빠지도록 몰아 봤습니다. 모처럼 매우 즐거운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 관련 배경지식이 일천한 저로서는 작품 곳곳에 박혀 있다는 무슨 여러가지 코드들에 대해 썰을 풀 능력이 없네요. 그래도 “제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이 어디가 어떻게 재미있었는지 한번 설명”해 볼께요.

기본 구성은 세기말이 낳은 걸작, ‘멋지다 마사루’와 비슷해 보입니다.

여러모로 대단한 실력을 가졌지만 종잡을 수 없이 괴상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 (하루히 : 마사루)이 나오고, 그 주인공 최측근에서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며 작중 나레이션을 담당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쿈 : 후밍)이 고교 입학후 부활동(SOS단:섹시코만도부)을 창설+시작하면서, 개성 있는 친구들이 모이고(미쿠루, 나가토♡, 이츠키.. : 마사히코, 캐서린, 모에모에..), 이런저런 사건들(외계인과의 조우, 야구부와의 야구 경기, 문화제 등등)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마사루가 허무한 개그로 시작해서 허무한 개그로 끝나는 것에 그쳤다면, 하루히는 개그를 양념 삼아 활기찬 고교생활을 그리는 데 좀 더 신경을 쓰고, 무엇보다도 시청자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끔 세심하게 스토리를 전개합니다. 하루히를 보고 나니, 마사루의 맹점은 마치 화장실에서 유머집 읽듯 피식 웃고 넘어가버릴 정도의 에피소드 나열이었을 뿐이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네요.

세기말이 낳은 괴작, 마사루 얘긴 이쯤 해두고.

저는 일본의 고등학생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런저런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짝 접한 바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그 시절의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겪는 일에는 한국과 일본(나아가 세계 각국)의 문화적 차이를 관통하는 어떤 보편적인 감수성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루히를 보면서 저는 제 고교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감회에 젖었어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입학 직후 학교를 때려치우겠다고 부모와 담임과 상담(이라기보다는 일방적 강요)을 하기도 했었고, 온갖 똥폼 다 잡으며 세상을 등진 고독한 사나이 흉내를 내기도 했었고, 반과 동아리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죠. 기타 등등. 그러고 보면 그 시절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성인이 된 이후 지금 제 성격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아요. :)

저는 고교 시절 섹시코만도부 방송반이었습니다. 입학하면서 입부원서를 낼 때만 해도, 할 말은 하는 정론직언 학내 자치 언론을 꿈꾸며 들어갔으나(덤으로 혼자 듣기 아까운 음악을 공유하는 DJ), 실질적으로는 교내 행사 때 마이크와 단상을 나르고, 방송 수업 촬영과 공지사항 송출 등을 무보수로 하는 대가로, 아무도 듣지 않는(심지어 선을 뽑아버리기도 하는) 점심시간 음악 방송 송출 권한을 덤으로 얻는 어용단체(…)였죠.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여러가지 케이블이 꽂힌 앰프와 믹서가 연결된 중앙 콘솔 앞에서 친구들과 이런저런 방송을 송출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어요. 대강당에서 장막과 조명 콘솔을 조작하는 것도 즐거웠어요. 방송제 준비는 힘들었지만, 하는 동안에는 조마조마했구요, 끝나고 나니 아쉬웠었어요. 방송반은, 대체로 즐거웠어요. :D

수업시간에는 주로 잤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중요한 건 수업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하 오히려 가장 안 중요한 걸로 꼽겠습니다. 3년 동안 입시 공부(또는 취업 준비)에 시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변의 마음 맞는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 아닐까요. 하루히는 바로 그 중요한 부분을 선명하게 되살려냅니다. 제 아무리 외계인, 미래인, 초능력자가 나오는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이어지더라도 그 황당무계한 시츄에이션들의 틈을 알차게 잇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몇몇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입니다. (고교생 시청자들에게는 공감?)

점심시간마다 또는 수업이 끝나면 습관처럼 달려가는 곳. 함께 있으면 왠지 즐거운 친구들이 기다리는 곳. 저녁 늦도록 하는 일 없이 죽치고 있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 곳. SOS단에게 문예부실(…)이 그렇듯이 제게는 방송실이 그랬습니다. 여름에는 선풍기를 틀고 겨울에는 난로를 트는 곳. 내가 가꾼 곳. 사연이 있는 물건들이 있는 곳. 소중한 곳. 여러 가지 추억이 서린 곳. 이를 테면, 켄지 일당이 수풀로 엮어 만든 아지트와도 같은 곳입니다. 하루히는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애정 듬뿍 담아 홈비디오 찍듯 다각도에서 담아냅니다. 그러고 보면 아다찌 미쯔루의 고등학교 배경 작품들은 형식은 현실적이지만 아무래도 내용이 초인 활약물인지라 오히려 이입의 정도가 덜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히는 오히려 그 반대에요. 설정상 우주인, 미래인, 초능력자에 조물주(…)까지 등장하지만, 내용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고교 생활을 촘촘히 그리고 있습니다. 이건 바로 우리 얘기에요. 그러니까 당근 재미있죠! 과연 일본과 한국 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서도 충분히 먹힐만한 재미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저도 언젠가 하루히 엔딩 댄스 동영상을… *-_-*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소개해 주신 lezhin님의 고품격 저질 블로그, 생각이 없는 블로그에 트랙백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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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히”에 대한 5개의 생각

  1. 오.. 레진님 글이 올라온거 보고 다보셨다니.. 놀라운 RPG(리듬,파워,집중력)입니다.

    룸메이트가 1화만 보고 어리둥절 해 하고 있는데 intherye님의 설명을 전해줘야겠네요.

  2. 전 1화 보고나서 퀄리티에 헉 하고 빠 모드로 돌입했습니다. 이렇게 흠잡을 구석이 없는 애니도 참 오랫만인 것 같네요. 작화야 극상이고 성우연기나 음악이나 연출이나 흐름이나, 전부터 최소한 평균 이상은 가주니….

  3. 14화 최종화도 재미있게 봤음. 내가 받은 메세지는, “만국의 고교생들이여. 연애를 하라!”

    닥/ Rhythm, Power, Gibjungryuk?

    하/ 애니 좀 본다 하시는 분들은 하늘빛마야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작화나 기타 등등이 훌륭하다고들 하시던데; 저로서는 그저 그림이 예쁘다는 느낌 정도밖에;;;

    닥, 하/ 1화 감상기
    처음: 음, 하루히..라는 애가 주인공이라던데 언제 나오나? 설마 파일 이름과 내용물이 다른 낚시(예: 전원일기가 나오는 포르노 테입)에 당했나!?
    중간 앞: 헐, 내용, 연출, 연기가 뭐가 이래 어설퍼!?
    중간 뒤: 이.. 이것은 설마? 어설픈 척 잘하네?
    끝: 1화는 낚시로군. 2화부터 시작하려나 보다. 방송반에서 영화 만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스폰서를 빌미로 인근 가게 삥 뜯던 기억도…

    방영 순서가 뒤섞여있다는 사실은 한 5~6화 가서야 눈치챘습니다. 1~4화를 보면서는 이거 혹시 순서 바꾸기 낚시에 당했나? 하는 의심부터 했었음. 어둠의 루트는 이래서 안 좋아요. 성격 버릴라.

  4. 아무리 그래도 실제로 주인공(하루히)는 좀 민폐죠..; 저렇게 일편단심 ‘내길을 가련다’..는 좀..;
    그리고 옆에 체크포스트 제목위에 마우스를 올리면 미리보기 기능이 있는듯한데요.. 다른것들은 얌전히 나오는데, 제것만 동체시력 테스트..;

  5. Charlie/ 한 일 분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시면 미래의 배우자 형상이 떠오릅니다.
    …가 아니고, 아무래도 영문 사용자가 만든 스킨을 사용하다 보니 세세한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고 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저도 불편해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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