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이야기

가칭-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 2탄 -_-;;

벌써 십수년 전의 일입니다. 여자 아이에게 생일 선물로 작은 인테리어 소품을 받았습니다. 어찌나 깜찍하고 귀엽던지.

호감도가 +2 상승했습니다.

그런데, 비어있어야 할 상자 속에 아직 뭔가 더 있습니다. 저게 뭐지?

그 안에는..

그 안에는 죽은지 오래되어 말라 굳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들어있습니다.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

패닉. 패닉. 패닉. 패닉. 패닉.

진짜 바퀴벌레인가? 뒤집어도 보고 엎어도 봤지만 바퀴벌레 맞습니다. 머리가슴배에 다리 여섯인 곤충인데, 어두운 갈색의 몸과 날개를 가졌고, 납작한 몸체에 더듬이 한 쌍. 크기는 1.5~2cm 가량, 그리 크지는 않은 놈입니다. 살짝 반투명해 보이는 것이 왠지 빈 껍데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퀴벌레가 허물을 벗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은지 오래되어 건어물 새우처럼 말라버리는 바람에 반투명해보이는 바퀴벌레의 사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덕분에 살아있는 걸 넣었는데, 전달 과정에서 죽어버린 것이라는 최악의 가설은 기각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간신히 이게 의심의 여지 없이 바퀴벌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그 다음 단계의 고민을 해봐야겠죠: 이게 대체 여기 왜 들어있는 거야?!?!?!?!?!?!?!?!

여러가지 가설들이 머리 속을 오갑니다.

설마 일부러 넣은 건가? 나한테 뭔가 한을 품었나?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 있나? 일종의 부적 같은 걸까? 아냐아냐 아마 가게 구석진 곳에 있던 재고품을 주인이 꺼내주면서 확인을 안 한 거겠지. 바퀴벌레는 아마도 작은 상자 속으로 실수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못찾았다던가 막혔다던가 한 것일테고. 그래도 만에 하나 일부러 넣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어볼까? 물어볼까? 저기 혹시 너 내 선물에 바퀴벌레 시체 넣었니? 근데 일부러 넣은 게 아니면 어떡하지? 상처받지 않을까? 괜히 예쁜 선물 골라주고 죄책감 들게 하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지? 진짜진짜진짜로 일부러 넣은 거라면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전염병이라도 걸려 죽기를 바라는 저주? 생일에 기분 잡치라는 골탕? 걔가 나한테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내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내가 걔 생일에 뭘 줬었지? 마음에 안 들었었나? 헉, 설마 거기에도 바퀴벌레 같은 게 들어있었던 걸까? 고민 끝에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걸까? 만약 그랬더라도 정말 내가 일부러 넣은 게 아닌데.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령 내 선물에 바퀴벌레가 들어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복수할만한 일은 아니잖아. 걔도 지금의 나랑 똑같은 고민을 했다고 치더라도 아무리 그 결론이 이런 식의 복수겠어. 게다가 저 선물은 너무 예쁘고 귀엽잖아! 게다가 가격표는 떼어내서 포장지로 포장까지 했다고! 고작 바퀴벌레 시체 한 마리를 넣기 위해서 저런 걸 고르러 돌아다녔다고 보기는 어려워. 그럼 뭐지? 역시 재고품 상자에 바퀴벌레가 우연히 들어가서 못 나온 걸 거야. 암 그렇고 말고. 우연한 사고, 실수겠지.

다음 날 그 여자애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뭔가 혼자 키득댄다거나, 나를 쳐다보면서 싸늘한 미소를 날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에도 그 여자애를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평소와 별로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몇 주 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여 물어보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하는 충동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쿵쾅거렸지만 어릴 적부터 몸에 벤 신사로서의 에티켓과 타인의 감정에 대한 무한한 배려심 콤보 방어로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몇 년마다 한번씩 귓가에 바람결에 그 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제 심장은 해결되지 못한 호기심으로 인해 한참을 쿵쾅거립니다.

에필로그: 이 일이 있은 후 저는 선물을 포장한다거나 편지를 봉한다거나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상자나 봉투 속을 샅샅이 살펴보는 경미한 강박 증세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덕분에 언제쯤이던가 딱 한번 정체를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털을 찾아낸 적 있어요! 그걸 그냥 줬더라면 대체 그 애의 대뇌 속에서는 어떤 참상이 벌어졌을까?! 나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상기하며 부르르 떨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후 증세가 더 심해졌어야 할텐데, 아예 웬만해서는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선물 할 일이 있더라도 포장을 하지 않는 최씨 고집스러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후로 비로소 완치될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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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야기”에 대한 9개의 생각

  1. 제가 알기로는 바퀴벌레는 허물을 벗습니다. 대신 변태를 안하죠. 변태는 그 변태가 아니고 왜 애벌레가 고치를 짓고 나비가 되고… 하는 그 변태. 새끼때부터 늙어죽을 때까지 모양은 그대로고 대신 허물을 벗어서 크기만 커지는 거죠. 그러니까 아마 상자를 어디 보관해뒀었는데 조그만 바퀴벌레가 들어와서 껍질을 벗고 도로 나갔던 모양이죠.

  2. 기/ 그렇군요. 트라우마 지수가 2등급으로 내려갔습니다. 감사감사.
    역시 바퀴벌레는 태어날 때부터 완전체인 것인가! 그럼 보통 바퀴벌레 껍데기를 볼 일이 없는 것은 벗자마자 먹어버리기라도 하기 때문인 걸까요. @_@

  3. 기/ 헐, 호흡기… -_-;;
    그때 그건 왜 안 바스라졌을까용. 뒤집어보고 굴려보고 했는데도 튼튼하던데. 좀 커서 벗어놓은 거라 두꺼웠나.. 으에.

    덕분에 새로운 걸 3콤보로 알게 되었습니다. 모기불통신에도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__) 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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