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 ‘너무’와 ‘같아요”

0. 먼저 저는- 아무리 널리 쓰여도 틀린 건 틀린 거지만, 아무리 틀렸더라도 인정해줘야 할 때가 온다고 보는 편입니다. 즉 제가 바로 말글 생활에는 머릿수가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1. “너무”는 deulpul님께서 말씀하신 부정적인 뉘앙스가 이미 많이 희석된 상황입니다. “내 인생의 활엽수”, “어의 없다”-,.- 같은 말이야 확실히 틀린 말이라 고쳐지는 편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너무” 정도야 뭐, 가벼운 마음으로 사전상의 정의를 고칠만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요즘 누군가 “너무 잘했다”라고 할 경우, “그렇게 잘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잘해버렸다”라던가 “컨닝한 거 아냐?” 같은 뜻보다는, 보통 “내 기대를 넘어설 정도로 훌륭히 잘해주었다”는 식의 뉘앙스로 널리, 아주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참, “컨닝”도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당당한 한국어 단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수사적 부정으로서의 “너무”가, 말씀하신 부정적인 뉘앙스의 “너무”와 혼용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충분히 파악해 냅니다. 그리고 전자가 더 자주 쓰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억해둬야 할 것은 단지, 아직도 한국어 사회에는 “너무”라는 말이 나오는 즉시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약간 귀찮은 해명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는 것 정도. 그래서 언론, 학문, 공무 등에서는 쓰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 정도.

2. “~ㄴ 것 같다”는 표현 역시 거의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변하는 겁니다. 기존 표현과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갖는 새로운 표현들은 계속 생겨나지만 그 중에 완전히 새로운 말이 뿅하고 생겨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맨 첫 문장에서 썼던 “~라고 보는 편입니다” 같은 표현은 어떤가요. 널리 쓰이는 표현인데 “보다”라는 동사의 뜻이 그대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 사용자라면 별 문제 없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보다”라는 동사가 가진 부분적 의미이며, 어쩌면 그 부분적 의미는 “~라고 보다”라는 표현이 생기고 나서야 더 부각된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들으면서 보긴 뭘 보냐는둥, 시각 장애인은 써서는 안될 표현이라는둥 그러면 이상하겠죠. “~ㄴ 편이다”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 그냥 관용적인 표현일 뿐인 것을 무의식적인 편가르기 정서가 반영되었다면서 비판하면 이상하겠죠. 미국인이 자주 쓰는 “be supposed to~” 어쩌고를 처음 들었을 때의 혼란과 당황이 떠오릅니다. 대체 뭘 가정했냐는… ;ㅁ; 단어 사전만 들고서 유추해내기 힘든 표현은 어느 말에나 있는 모양입니다.

“같다”의 경우 사전상의 정의는 추측이나 불확실한 판단을 의미합니다. 그럼 정말로 논술 채점하듯 그런 맥락에서만 쓰일까요. 말이란 게 늘 그렇듯 “~ㄴ 것 같다”는 표현이 가진 판단보류의 뉘앙스는 새로운 쓰임새를 얻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고, 다른 목적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저 말버릇이기도 합니다. “나 아픈 것 같아”라는 표현은 자기가 아픈지 안 아픈지 판단할 줄도 모르는 사람의 한심한 표현이 아니라, 판단의 권한을 청자에게 위임하는 겸손이기도 하고, 그 판단을 해달라는 바램, 즉 내가 아픈지 좀 봐달라는 바램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일 때도 있고, 선생님한테 아프니까 조퇴해도 되냐고 곧장 물으면 속보이니까 작업 거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동안 아픈 것을 참다가 말한 것이라면 자기 능률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지 않기 위한 수사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그냥 별뜻없는 말버릇일 수도 있고요.

“이 책 너무 좋은 것 같아요”가 책이 좋은지 안 좋은지도 판단 못하는 사람의 잘못된 표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은지 안 좋은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자기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남들도 좋아할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그 책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면 또 뭐 어떻습니까. 그 책을 읽고 좋다는 감정이 들긴 했는데, 그게 그 책 때문인지, 그 책을 싸게 샀기 때문인지, 그 책을 선물해준 사람이 이뻐서인지, 아니면 그냥 괜히 기분이 좋은 건지 잘 모를 수도 있는 노릇 아닙니까. 그냥 좋아하나보다 하면 되지 굳이 말한 사람의 머리 속을 까봐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좋아 죽겠다” 같은 표현을 두고 따지면서 이 사회에 만연한 생명경시풍조를 탓하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유머가 아닌가 했지만 아니더군요. -_-;;; 그냥 아주 많이 좋은가 보다 하시면 됩니다. “너무너무 좋아요”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아주 많이 좋은가 보다 하시면 됩니다. “좋은 것 같아요”도 마찬가지. 백번 양보해서 싫지는 않은가 보다 정도로만 이해하셔도 됩니다. 이미 그러시고들 계시겠지만.

3. 오마이뉴스 기사가 지적한 표현들이 언론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말일지는 몰라도,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말은 절대로 아니다. 인터뷰나 방송에 적합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존나 좋아요” 정도는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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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9개의 생각

  1. 사전을 몇 개 찾아봤는데, “너무”에 부정적인 뜻이 있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군요. 심지어 “너무 반갑다”는 표현도 있어요 (우리말 큰사전)
    걍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인 것 같은데요.

    “너무”가 부정적의 뜻을 가졌다는 주장은 영어(“too”)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이…

  2. y1/ 덧글만 봐도 그런 것 같네요. ^^
    y2/ 한글로 쓰면 깨지기에 항상 해당 영단어로 쓰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r/ 저 역시 그런 망상을 하고 있습니다. 영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너무”가 들어간 문장을 거북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_@ 똑같이 “어떤 한계를 넘어섰다”는 정의를 읽고도 그 한계가 넘어도 좋은 한계인지, 넘지 말아야할 한계인지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갖더군요. 가바가이가바가이. -_-;

  3. 가/ 앗, 고새 덧글이! 이런 상황 아주 좋아합니다. 가루님 매력포인트 1점 추가.

    존나가 지금과 같은 추세로 지속적으로 보급되기만 한다면, 평균 수명 만큼만 살아도 죽기 전에 그 말을 쓰는 언론을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하하

  4. 본문에 방송/언론 구분을 좀 모호하게 한 것 같아서 추가함.

    방송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전파 등을 송출하는 매체, 그리고 그 내용물을 가리킴. 언론은 방송이나 출판 등의 수단으로 사실이나 의견을 전달하는 형식이라고 할까나?

    인용되거나 사료로 남고 싶은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정제된 문어체식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 모호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면 골룸되기 십상인데 이것이 구어체의 대표적인 특징. 때문에 언론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 가장 보수적인 곳 중 하나.

    아홉시 뉴스는 대표적인 “방송을 통한 언론”. 드라마나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방송이되 언론은 아님. 딱히 고상한 프로가 아니라면 실제 언어생활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반영한다 해도 문제 될 것 없음. 오히려 어떤 작가들은 그런 걸 추구하기도 하는 듯.

    인터뷰는? 이게 재밌는 건데- 딱히 전문가 인터뷰가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인터뷰라면 딱딱한 언론에 생생함을 더해주는 부가요소로서, 얼어붙은 표정으로 앵커 언어 구사하는 사람보다는 친숙한 구어체를 쓰는 사람이, 심지어 더듬거나 사투리 쓰는 사람이 더 효과적일 수 있음. 적어도 내가 피디라면 앵커처럼 말하는 인터뷰이는 편집해버릴 것임. 하하.

  5. !@#… ‘존나’를 ‘조낸’으로 희석시켜서 준표준어로 쓰고 있는 한국 인터넷유저들의 창의성에 경배를… :-) 가끔, 저는 그런 모호한 언어사용의 잣대를 아예 뚜렷하게 못박아버리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욕설이 아닌 신조어 중, 사람들의 입을 타게 된지 5년이 지나가면 공식적으로 방송 적합용어로 허용하기” 라든지.

  6. c/ 조낸은 어떤 경우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최근 온라인 상에 만개한 ‘순화된 비속어’ 문화는 온라인 게임 & 게시판 서비스의 특정 문자열 필터링 삽질에 힘 입은 바 클 겁니다. 막을 걸 막아야지.. 하하. (이 단어 저 단어 빼보는 시험 끝에 동사 ‘보다’의 어미가 변형된 ‘보지’가 막힌 걸 알게 되었을 때의 황당함이란! ㅠ_ㅠ) 사용자들의 창의성을 꽃 피워준 업자들의 아둔함에도 경배를…

    시간 지정 괜찮을 거 같네요. @_@ 지금은 아마도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하는 사전쯤에 표준어로 등재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듯..? 이거랑 대충 몇 년이나 차이 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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