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오라토리오

교회가 예술의 주된 후원자가 된 것은 엄청난 부 덕분이었다. 역사가 다르게 전개되어 미켈란젤로가 거대한 과학관의 천장 벽화를 그리는 일을 의뢰받았다면, 그는 적어도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만큼 감동을 주는 무언가를 그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베토벤의 <중생대 교향악>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 <팽창 우주>를 들을 수 없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리고 하이든의 <진화 오라토리오>를 못 듣는다는 것도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리차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137-138쪽.

나도 유감스럽긴 한데, 도킨스의 가정에는 회의적임. 중생대나 팽창 우주, 진화 등을 예술 작품에 우려낼 정도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지적인 노력이 필요할 텐데, 그런 건 위대한 예술가의 인생을 낭비하는 측면이 좀 있음. 종교의 한 가지 미덕은, 굳이 시간 들여 머리를 쓰지 않고도 헌신적이고 숭고한 동기를 품게 해준다는 것.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기니까, 아무래도 이 쪽이 실용적;;; 감상자 쪽도 마찬가지.

읽다가 메모.

진화 오라토리오”에 대한 6개의 생각

  1. 게다가 과학관의 천장 벽화는, 아무래도 싸구려로 구리게 그릴 듯.

    종교의 또 한 가지 미덕은 기능적이거나 실용적이지 않은 것(대표적인 예: 예술)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을 동기를 품게 해준다는 것. -,.-

  2. 현대 작품들 중에는 실제로 과학적 개념에 (그걸 예술가들이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는 의문스러울 경우가 많지만) 영감을 얻어서 만들어진 작품들도 좀 있지요. 이를테면 리게티의 메트로놈 교향시를 들어보면 이것을 결정론적인 (andor ‘신’의 개입 없이 동작하는) 세계의 진화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리게티 자신은 엔트로피 운운하기도 했고. 현대 예술의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은 그보다는 물론 정치와 경제이겠습니다만서도.

  3. yy/ 에, 그러니까.. 예술과 과학의 퓨전은 SF만 믿고 가는 겁니다. -,.-

    g/ 뭐 하지 말라거나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고, 아무래도 비교적 어렵지 않겠나 하는.. 그러고 보니 현대 인문학자 중에 과학적 개념에 영감을 얻어서 이것저것 썼다가 쿠사리 먹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도 하다지요;;
    그건 그렇고 결정론적인 세계의 진화(?)에 대한 은유로 해석이 가능한 음악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작곡 전공인 애인님께 리게티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저는 짜파게티만 떠오르는 놈이라..

  4. 소칼 맥락에서 인문’학자’들이 한 짓이야 맞아죽을 짓이지만 예술가들은 ‘예술을 위해서’라고 하면 웬만한건 다 용서가 되니까요. :) 그러니까 그 계통 사람들의 가장 쉬운 탈출구는 아마 ‘우리가 한 건 사실은 예술이었어!’ 라고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 그 영감의 ‘원천’을 얼마나 잘 이해해야 하는지는 아주 애매하죠. 이를테면 클림트가 대학 3부작을 그렸을 때 의학 법학 철학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았겠어요. 하지만 실제로 그림을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보면 꽤 그럴 듯 하잖아요?

  5. g/ 인문’학자’들에게는 예술가 기질도 좀 있는지라- 그저 영감을 받았을 뿐인 비유, 수사라고 봐줄 법한 부분도 있었을 텐데, 치사하게 뒤통수 깐 면도 있긴 있는 듯해요. 그렇게 봐주더라도 속물 기질이라는 건 여전하겠지만.

    하긴 따지고 보면 종교적 소스에서 영감을 받은 많은 작품들 중에도 신학적 지식이나 두터운 신앙심 같은 게 없어도 가능했던 작품들이 있겠죠. 영감이란 어차피 피상적인 지식, 아니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되어도 그만일테니까요.

    근데 그렇다 치더라도- 과학보다는 종교가 더 쉽고 간단하게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이 아닐까 하는 편견은 가시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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