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대가리 방

중국어 방이라는게 있습니다. 존 설이라는 장난꾸러기가 만든 사고실험 논증의 이름인데요.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눌러보시고…

대충 요약하자면,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인간에게 중국어 질문-대답 목록만 쥐어주고 방 안에 숨겨놨는데, 방 안으로 중국어 질문을 집어넣을 때 어쨌거나 그가 제대로 된 중국어 대답을 방 밖으로 내놓는다면, 그가 중국어를 할 수 있다고 결론지어도 되겠느냐 안 되겠느냐 하는 식의 사고실험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방의 인터페이스가 미소녀라면 그 방을 하나의 인격체라고 봐줄 수도 있다능…)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모순화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주워들었던 저 논증이 갑자기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떠오른 중국어 방 논증을 제 마음대로 마구 변형시켜봤는데요, 흠 이 변형된 방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일단 가칭: 돌대가리 방 논증이라고 부르도록 하죠.


이 푸른 지붕의 돌대가리 방 안에는 돌대가리가 하나 들어있습니다. 이론상 이 돌대가리는, 대통령의 직무를 단 하나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두죠.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야 없겠지만, 이론상 이치에 닿는 말 한마디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둡시다. 그런데 이 돌대가리 방의 창구에는 매우 유능한 보좌관, 대변인 등 일군의 “메신저”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돌대가리가 아무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해대도, 이 메신저들은 그것을 어떻게든 이치에 닿는, 말이 되는 대통령 말씀/정책으로 변형시키는 고된 일을 수행합니다.

한 외교 전문가는 “예컨대 한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동시 개선의 경우 비논리적인 주장처럼 들리지만 한미관계가 개선돼 우리가 미국을 움직일 정도가 되면 북미관계 개선을 최우선으로 하는 북한도 우리와 관계를 개선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물론 사고 실험이 우리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를 테면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죠. 돌대가리가 한 말도 이렇게 전문가의 장황한 해석 과정을 거치고 나면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해석을 거쳐서 국가 정책에 적용시키고 나면 돌대가리가 애초에 했던 말은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돌대가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말을 했었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잠꼬대였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뽕맞은 무녀가 방언을 하면, 탐욕스런 노친네들이 그걸 멋대로 해석해서 국가 중대사에 반영하는, 300의 스파르타식 정치로의 퇴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지만, 그냥 착각이려니 하고 넘어갑시다. 무녀는 예뻐야 하는데, 우리의 돌대가리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과연 이 돌대가리를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진짜배기 ‘대통령’인 걸까요. 보통 대통령이란, 세 글자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마는, 이 경우에 그 돌대가리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왠지 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역시, 사람 한 명이 아니라 방 하나를 통채로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닐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방의 인터페이스가 나경원이라면 인정해줄 수도 있다능…

저는 이게 대통령제의 폐해 같은 것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복잡다난한 현대사회에서, 그것도 대한민국 같은 선진국가의 수장 자리에 한 사람의 인격체를 앉혀둔다는 것은, 사실상 그에게 그 자리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플라톤이 철인(iron man이 아니라 philosopher ㅡ,.ㅡ) 정치를 얘기할 때만 하더라도, 뭐 혼자서 대충 이래저래 뭔가 해볼 수 있었다 칩시다. 하지만 지금은, 플라톤이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오 쒯”하고 “나안해 나안해” 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제정신 박힌 사람 치고 그 자리를 원할 사람 자체가 드물기도 할 겁니다. (제게 플라톤이 제정신이었느냐 물으시면 글쎄요-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렇다면, 기왕 앉혀두는 거 애시당초 어중간하게 똘똘한 놈보다는 아예 돌대가리를 앉히는 것이 최소한 일부 집단에게는 훨씬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메신저”들을 배출할 집단이라던가…) 또한 행동의 유연성을 높이고 책임은 피하며 심지어 유사시에 돌대가리에게 모든 걸 뒤집어 씌울 수도 있기 위해서는, 역시 해석의 여지를 되도록 많이 남겨두는 말을 해대는 돌대가리가 최선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배타적인 내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공익을 포기하기 시작할 때, 대통령제의 본질로부터 비롯되는 폐해가 나타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런 식의 돌대가리-대통령제는 불가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만 운용되면 매우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에서도 이미 지난 몇 년간 그 영험한 효력을 훌륭하게 검증한 바 있습니다. 현재 미국 대통령은 오로지 사진 찍히고 짤방으로 편집되기 위해서만 존재합니다만, 미국이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돌대가리-대통령제의 장점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말을 짧게 할 수밖에 없는데 오해가 없도록 정확히 해석해 주는 측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게임 기능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습니다. 돌대가리의 말을 받아적을 사람, 그 말을 해석해줄 사람, 해석에 추가 주석을 덧붙일 사람, 해석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 이의 제기에 대한 반론을 다시 덧붙여줄 사람, 돌대가리가 방 바깥에서 떠들다가 사단이 나면 쫓아다니면서 뒤치닥거리를 해줄 사람, 기타 등등등등, 뭐 거의 오백만의 일자리가 즉석에서 창출됩니다.

오늘의 결론: 저는 차기 대통령 감으로 별이 열한살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물론 심심이와 경선부터 치러야겠지만, 한국에도 이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다고 봐요. ㄳ.

돌대가리 방”에 대한 15개의 생각

  1. !@#… 혹시 모기불님의 찬사 덕분에 삘받으셔서 이런 걸작포스트들을 최근 연타하시고 계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찬사릴레이라도 돌리겠습니다! 고품질 만담에 굶주렸던 객들에게 착취당하실 준비를 하시길… 핫핫

  2. yy/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능..

    c/ 꼬.. 꼭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그냥 쓰고 싶어서 쓴 것 뿐이니까..

    이/ 마릴린 명박의 사진이라면 예전에 올렸다가 법이 무서워서 내렸었는데, 최근에 다시 아무도 모르게 되살려둔 바 있습니다.
    https://intherye.wordpress.com/2007/01/25/marilynpark/

    비/ 방언크리 터졌습니다.

    정/ 이론상, 돌대가리의 의지만으로는 무대포 추진이 불가능합니다. 개인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된 특정 집단의 욕망이 마침내 발현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3. 읽다가 눈물을 흘릴뻔 했습죠. 적절히 똑똑하고 적절히 바른말을 할줄 아는 대통령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도록 여기저기서 태클크리가 날아온))다는 사실은 지난 5년간 증명이 된듯…;;

  4. ㅋㅋㅋ 알츠하이머를 앓고도 미국 국정을 잘 운영했던 레이건도 또 다른 사례가 될 수 있겠네요. 저는 레이건이야 말로 공화당의 이념을 가장 잘 보여준 대통령이었던 듯 합니다. :-/

    “치매에 걸려도 대통령 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정부”

  5. 새/ 아니 웬 눈물까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맑은 눈 부릅뜨고 지켜봅시다. ⊙_⊙

    폽/ ㅋㅋㅋ 오랜만입니다. 폽시클님 블로그의 부시 사진 좋아해요. 그는 참으로 모든 대통령의 귀감입니다. 대통령계의 패리스 힐튼이랄까요..

    어쩌면 5월 아르헤리치 공연 때 스쳐지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6. 결론은 자포드 비불브락스…

    튜링 테스트를 반박하기 위한 논증이군요. 제가 보기에는 “이해”라는 말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혼동시킨 사기로 보입니다만.

  7. R/ 측근인 부통령 모에…

    그러고 보니, 자포드가 만나러 갔던 무심한 우주의 통치자 역시 돌대가리는 아니었어도 뭔가 정상은 아니었네요. -_-;

    중국어방도 쫌 사기성이 있긴 하지만, 튜링테스트 역시 사람 껍데기 흉내만 내는 꽁수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의미있는 지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당. 아무리 겉보기에 비슷해 보여도 메카니즘이 이건 아닌데 싶은 건 좀 걸러낼 수 있어야겠죠..

  8. 웨스트윙 같은 드라마를 보면, 보좌관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죠. 돌대가리 방 가설(?)이 사실이고 대통령이 지식이나 능력면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추구해야할 가치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9. 세/ 네, 그래야죠. 사실 선거란 각종 정책 공약들의 조합을 의인화…하느니, 따로 할 일 없는 실제 사람을 데려다 앉혀놓는 일종의 캐릭터 산업이니까요. 히히

    농담이고.. 저는 최소한 정상회담 따위에서 돌발적으로 사고치고 돌아다니지만 않아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블로그를 운영하고 계시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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