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돌파 한글라간

제가 뭐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모국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동시대의 한국어를 난잡할지언정 생생하고 정확하게 구사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 며칠 간 생각해본 걸 주절주절 늘어놓아 봅니다.

떡밥이 쉬었으니 싫다 밉다 정줄논듯…하는 식의 짤막한 논평들은 이미 여러 곳에서 쏟아져 나왔으니, 저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한번 풀어써보겠습니다.

음, 동시대 네티즌 동지 여러분을 위한 한 줄 요약부터:

언어, 특히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글로 남겨질 어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기 때문입니다.

어휘, 특히 문자 표기는 시공간적으로 일관적이어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도 곤란하고, 이 신문과 저 잡지가 달라도 곤란합니다. 역사적 기록을 위해서도, 인터넷 검색을 위해서도, 불필요한 혼동과 지출을 막기 위해서도, 이것은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세종대왕 시절에야 뭐 금방 다시 알아볼 수 있게끔 적을 수만 있게 되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고, 각지방 사투리도 지금보다 엄청 심했을 테고, 한글로 무슨 역사 기록을 남길 생각도 별로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도 하드디스크나 인터넷도 없었을테니, 뭐 걍 지 멋대로라도 대충 읽고 쓸 줄만 알게 되어도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하는 취지로 만들었을 겁니다. 거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저처럼 어린 백셩으로선 감사감사 굽신거릴 따름입니다만- 그 결과물을 만든 사람이 염두에 뒀던 취지대로 쓸 필요는 없죠. (제가 보기엔 이경숙 위원장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것 같은데, 세종대왕 들먹이면서 욕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 가더군요.. 이런 내용의 지적을 어느 블로그에선가 딱 한번 지나친 거 같은데 다시 못 찾겠네염.)

어제까지 노자라고 부르던 사람을 오늘부터 라오쯔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리 다른 모든 면에서 합당하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오랫 동안 수도 없이 그 사람을 노자라는 이름으로 불러왔기 때문일 겁니다. 전에도 썼듯이 저는 언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일원칙이 있다면 바로 머릿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이가 맞고 어의가 틀려도, 언중 다수가 어의라고 쓰게 되면 사전에 어의를 등재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큰 사전이라면 어원과 잘못된 변화과정도 함께 실어주겠죠, 뭐. 저는 이를 테면, “다르다”와 “틀리다”의 구분, “얇다”와 “가늘다”의 구분 등이 이미 이런 영역에 들어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새 어휘 도입 초기에 뭔가 잘못되어서, 포크레인, 대일밴드, 스카치테이프, 호치키스 같은 이른바 “틀린” 단어들이 널리 쓰이고 있을 경우에도 그것을 바로잡고자 노력하는 것은, 우리 모두 세벌식을 쓰자는 구호만큼이나 올바르지만 허황되다고 봅니다. 그래서 새 어휘를 만들거나 들여올 땐, 누구보다도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킹왕짱이라고 생각합니다. 뒤늦게 들어와서 박힌 돌을 빼내려면 웬만큼 거창한 명분 가지고는 택도 없습니다. 적어도 스케일이 “일제 잔재 청산!”쯤은 되어야 그나마 미적미적 먹히는 정도입니다. 뒤늦게 “순우리말” 따위의 명분을 가지고 달려들면 따라잡기는커녕 혼란만 가중시키기가 십상입니다. “원어 발음에 가깝게”라는 꽤 괜찮은 명분도 최근 축구선수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미 공고히 자리잡은 말들까지 때려잡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미국 가서 가게 점원이 알아들을 수 있게”라는 명분은 가히 찌질 오브 더 센추리로 지정할만합니다.

기왕 선수를 친다면, 초기에 올바른 길을 터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괜찮은 번역어가 떠오른다면 새로 만들어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한자를 공유하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먼저 좋은 번역어를 만들어 쓰고 있다면 그걸 가져다 쓰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문제는 번역어가 아닌 그냥 소리만 따온 외래어들…

새 어휘의 물량공세가 엄청난 IT업계나 각종 과학 분과 같은 전문분야에서는 아예 일찌감치 깨끗이 항복하고, 그냥 토씨만 한국어로 쓰다시피 하고 있으며, 특히 영어 사용자들조차도 쏟아져나오는 걸 감당할 수 없는 알파벳 두문자 같은 경우, 아싸리 그냥 알파벳으로 써버리는, 사실상의 이중언어체계가 공고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얘들은 걍 지들이 알아서 하도록 냅두기로 하고…

오렌지, 망고, 아보카도, 브로콜리 같은 일상 어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용.
아까도 말했듯이 먼저 들어와서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 있으면 일단 그걸 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사실 그것만이 가장 실용적이고, 실리적이고, 경제적이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유일무이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대운하를 파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상식적인 원칙 같은 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새 원칙 만들자며 달려드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을 겁니다. 삼천년 뒤 후손을 위한 관광자원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가진 사람이, 삼천 년 뒤 후손을 위한 어휘 체계를 바로세우겠다는 각오로 달려들면 일반인의 상식을 위반하게 뛰어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군다나 겨우 한두 세대 뒤의 실질적인 영어 공용어화 같은 것을 은연 중에라도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미국 발음 기준’이라는 대원칙은 “박정희의 경부 고속도로 프로젝트™” 만큼이나 선지적인 위업의 고행길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어쨌거나) 추진™”해야만 할 사업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 그렇다고 칩시다. 운하도 파고, 어휘도 미국식으로 바꾸기로 합시다. “잃어버린 10년™”을 뒤찾은 자들이 앞으로 백년 이백년 동안 완소 정권을 절대로 놓치지 않고 뜻한 바를 모두 이루기 위해, 어거지도 안 쓰고 민주적 절차를 착착 밟아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잠정적으로 가정해 봅시다. (전 정말로 이렇게 될 거라고 51%쯤 확신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문자도 공용어 체계를 갖추는 게 어떻겠냐…고 되묻고 싶지만,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 가타카나 쓰듯이 알파벳을 한글이랑 같이 써버리자고는 하지 않는 이유를 저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혹시 나중의 충격을 대비한 사전 준비 작업이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어렴풋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한글을 이용한 외래어/외국어 표기 원칙을 미국 발음 중심으로 바꾼다고 칩시다.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원칙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가 되었든간에, 그 새 원칙을 통해서 외국어를 한국어 속에 재현해내는 데에 있어서도 일관적이어야 합니다. “미국의 교양있는 수도 시민™”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 한국어로 옮기는 사람들이, 같은 단어를 옮길 때마다 다르게 옮겨서는 안된다는 그 일관성이,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엔 두번째로 중요한 원칙입니다. (뭐 이것 역시 운하를 파겠다는 각오라면 거칠 것이 없긴 합니다마는.) 받아적을 때마다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표기가 달라져서야, 매번 각 어휘의 동일성을 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이 디지탈 시대에 검색조차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외래어를 각기 다른 표기로 두번 세번씩 검색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ex. 디지탈, 디지털..) 요즘엔 검색 엔진도 똑똑해져서 알아서 그런 다른 표기법까지 추적해서 함께 보여주기도 하지만, 검색 엔진이 똑똑해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외래어 표기의 춘추전국시대를 만들어놓고는 똑똑한 검색 엔진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재현의 일관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우선 세부 규칙, 예외 사례의 수를 되도록이면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많아질수록 배는 산으로 가게 됩니다. 영국 사람 이름은 영국식 발음으로 미국 사람은 미국식 발음으로, 영국 출생 미국인은 미국식 발음으로, 영국에서 활동중인 미국 영주권자는 미국식 발음으로, 영국과 미국 이중국적자는 미국식 발음으로 하는 식으로 만들면 골통이 빠개지겠죠? 그래서 세부 규칙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영국이 뭐야 몰라 그거, 아예 대통령 텍사스 사투리 미국 동부 표준어™로 대동단결하자! 하는 식의 임의적인 주원칙 같은 걸로 결국 수렴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것이 비굴할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비실용적인 삽질에 뻘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그게 장기적으로 실용적이라고 믿고 그런 식의 개정을 기어코 추진하겠다고 한다면 뭐 그렇다고 칩시다. 까이꺼 운하도 파는데, 미국 동부 발음 정도도 못 따라가겠습니까. 시대의 흐름이려니 하고 계속 따라가보기로 합시다.

저는 이 때 될 수 있으면, 논리적으로 조합 가능한 무수한 한글 글자들 중에 기존 어휘에 쓰이고 있는 글자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실제 귀에 들리는 소리랑 비슷하게 표기할 수 있다고 해도 한국어 문장 중간에 륀이나 뤤 같은 글자를 쓰는 것은 독해의 흐름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재현의 일관성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런 글자가 튀어나오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처음 받아적는 사람들조차 매번 거의 같게 쓸 수 있는, 간단명료한 표기 원칙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위와 같이 몇 가지 원칙에 이런저런 제한 요소들을 도입하고 나면, 그것이 현행 외국어 외래어 표기법과 뭐가 그리 달라질까 궁금합니다. 대체 오렌지 위원장의 머리 속엔 어떤 그림이 들어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뭐가 이래 기냐.. 이게 다 뭔 소리래. 몰라 그냥 올려부러. (인수위도 뭐 발표할 때마다 사실은 이런 심정이 아닐까?)

영어돌파 한글라간”에 대한 5개의 생각

  1. 일관성에 대한 얘기는 공감. 단 “이경숙 위원장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취지에 가장 부합”라는 부분은 꼭 지적하고 싶군요-그렇게 보는 것은 표피만 보는 겁니다. 한글이 발음 표기를 가장 실감나게 할 수 있는 문자 체계인 것은 물론 세종대왕이 그렇게 의도했기 때문입니다만, 세종대왕이 왜 그랬을까요? 그건 [어린 백성]들이 중국말을 쓰는데 중국어 표기법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엄연히 우리 말이 있고 우리 말의 음가에 맞는 표기법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발음을 있는 그대로 표기하겠다]라는 목표(이것은 취지가 아니죠)만 봐서는 곤란합니다. 취지요? 말 그대로 “어린 백성이 이르고저 할 바 있어도 그 뜻을 시러 펴지 못하기에” 입니다… 이경숙과는 정.반.대.의. 취지(동기?)라고 할 수 있죠.

    물론 다 아시겠습니다마는 혹시나 해서 부언합니다..

  2. 지나가다 한 말씀 올리지만, “이경숙 위원장의~가장 부합”이라는 구절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이 힘듭니다. 투더리님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서술해 주셨네요….

  3.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

    “한국어 문장 중간에 륀이나 뤤 같은 글자를 쓰는 것은 독해의 흐름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재현의 일관성을 방해”

    이 부분은 특히나 인상적이네요.

    위 투더리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좀 헷갈리네요. 글 전체 취지와는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외래어표기를 실질적인 외국어 발음과 일치시키고, 그렇게 하기 위해 소모되는 혼란과 그렇게 했을 때 생겨나는 이익을 비교하면 , 글 전체 본문이 지적하는 것처럼 굳이 그런 뻘짓을 시도하는 것은 그다지 효율성이 높지 않을 것 같아요. : )

  4. 투, 지/ “어린 백성이 오렌지라고 읽어도 그 뜻을 미국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에”, “본토 발음 음가에 맞는 표기법”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걸 강력하게 주장할 마음은 없으니 좀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_@

    민/ 한글만 그런 게 아니라, 알파벳 단어도 철자만 딱 보면 아 이건 영어가 아니겠구나 하는 식의 느낌이 팍팍 오는 철자 배열이 있죠.
    어째 이름만 실용정부이고, 하는 짓은 중의적 의미에서 삽질정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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