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약 먹을 시간이다

우리 아들은 똑똑해서 공부도 참 잘합니다. 이번 주 전국 학력 평가에서도 역시 반에서 일등입니다. 얼굴도 날 닮아서 참 잘생겼습니다.

그런데 속상해 죽겠습니다. 이번에 우리 애는 전교에서는 구등인데, 옆집 철이는 전교에서 이등을 했답니다. 우리 아파트에 공부 잘하는 애들 둔 아줌마들끼리 하루이틀 걸러 한번 꼴로 모여서 차 마시는 모임이 있는데, 요즘 철이 엄마 콧대가 얼마나 높아졌는지 눈꼴이 시려 죽겠습니다. 어제는 글쎄 이번 주 성적표까지 가지고 왔더라고요. 반 등수는 똑같이 일등인데 전교 석차만 봐도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지난 번에는 철이가 칠등, 우리 애는 팔등이었기에 이번엔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 더 벌어져버렸거든요. 안 보는 척 곁눈질로 슬쩍 학군 석차나 전국 석차까지 보니까 제가 다 억장이 터져서 앓아 누울 지경입니다. 흥, 그래도 우리 애는 잘생겼지! 철이 녀석 살은 뒤룩뒤룩 쪄가지고 요즘에는 글쎄 망측하게 가슴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 철이보다 더 속상한 건 옆 단지 사는 미영이 때문입니다. 여자애가 얼마나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지 말도 못합니다. 아파트 시세는 우리집보다 사천오백이나 낮은 주제에 솔직히 딸년 하나는 잘 뒀습니다. 어떻게 된게 새 학기 들어 매주 전교 일이등 자리를 놓치지를 않습니다. 매달 종합 평가에서도 언제나 일등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조금 기복이 심했는데, 글쎄, 에미라는 사람이 올해부터 딸에게 피임약을 먹이고나서부터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단지내 상가 약국 하는 미숙이네 엄마가 알려줬지요. 세상 참 말세입니다.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딸애에게 피임약을 먹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까짓 전교 1등 가끔 좀 못하면 어떻다고. 저라면 소문 날까 무서워라도 피임약 먹일 생각은 못할 것 같습니다. 망측하기도 해라.

철이하고 등수가 벌어진 건 아무래도 이번에 새로 나온 에스트로 뭐시기 하는 약을 안 먹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미숙이네 엄마가 처음 권했을 때 반신반의하고 먹이지 않았었는데, 등수가 팍팍 오른 철이를 보니 효과가 있긴 있나 봅니다. 철이 엄마는 여편네가 얼마나 깍쟁이인지 옆집 사는 저한테도 애한테 무슨 약을 먹이는지 말을 안 해줍니다. 하지만 내가 미숙이네 엄마를 꽉 잡아둔 덕에 철이네가 무엇무엇을 먹이는지는 훤히 다 꿰고 있습니다. 여우 같은 여편네야 이건 몰랐을 거다. 히히.

우리 애한텐 그 동안 무슨 삼이랑 뿔을 달였다는 한약만 먹이고 있었는데, 신문을 보니까 요즘엔 양한방 복합처방이 인기라고 하더라구요. 그나저나 그 에스트로 뭐시긴가 하는 약을 먹으면 여드름 난 애들 피부도 고와진다고 합니다. 미숙이네 말이 원래는 무슨 부작용 같은 거라던데, 부작용이라니까 지레 걱정은 좀 되지만 뭐 나쁜 것도 아니라니 한번 먹여봐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우리 애 여드름 흉 때문에 잘 생긴 얼굴 망가질까봐 속상했는데,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시험 잘 보는 약이라고 권해서 먹였더니만, 괜히 밤에 잠만 안 온다 그러더니 시험 끝나고 나서 며칠 동안이나 정신을 못 차리고 비몽사몽 헤매더라구요. 이번 약도 그런 부작용이 있으면 안될텐데 겨우 여드름 안 나는 부작용이라니 뭐 괜찮겠지요.

게다가 이게 또 은근히 여자애들한테 쓸데없는 관심을 줄여주는 데 특효가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왜 남자애들 징그러워지기 시작하면 온종일 여자 생각만 한다잖아요. 안 그래도 옛날엔 천사 같기만 하던 우리 애도 몇 달 전부터 여드름이 송송 돋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방문도 자꾸만 잠그려고만 들고 그럽니다. 어쩌다 잠기지 않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후다닥 놀라는 꼴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럼 그렇지 같은 반 기집애한테 홀려가지고 정신을 못차리고 있나 보더라구요. 예전엔 정말 착한 애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공부도 지지리도 못하는 년일텐데, 아들놈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니까 얼굴도 못났더만요. 맨날 지금 네가 여자애한테 한눈 팔 때가 아니라고, 대학 가면 실컷 만날 수 있다고 말은 해줍니다만 어디 그 나이 사내놈들이 어른 말을 들어야 말이죠. 그런 소리 할 때마다 오히려 또 핸드폰 훔쳐본거냐면서 신경질만 부리면서 방문을 잠그더라구요. 나쁜놈 에미 마음도 모르고.. 이럴 땐 정말 딸 키우는 엄마들이 부럽습니다.

그 놈의 기집애 때문에 자꾸만 전교 등수도 떨어지는 거였나 봅니다. 우리 아들 꼬드기지 말라고 걔네 엄마한테 전화도 해봤는데, 무식한 여편네가 사람 말귀를 통 못알아먹더라구요. 이러다 우리 아들 십등 밖으로 밀려나면 동네 챙피해서 어떻게 밖에 돌아다닐지 상상도 안 됩니다. 쪽팔리게 철이네 엄마는 또 어떻게 보구요. 가끔 그렇게 집에 있으면서도 없는 척하는 엄마들이 있는데, 내가 그 짝이 될 수는 없지요, 아무렴!

전에 이런 여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걱정이 되어서 철이네는 그런 일 없냐고 물었었는데, 자기네 애는 걱정 없다고 은근히 약을 올리던 게 기억이 났습니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 약 얘기였나 봅니다. 관심을 줄여준다고는 그러던데, 이미 생긴 관심도 끊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속는 셈치고 우리 애도 내일 당장 약국에 들러서 사다가 먹이렵니다.

우리 아들 화이팅! 다음 달엔 꼭 전교에서 일등 하거라~

얘야, 약 먹을 시간이다”에 대한 13개의 생각

  1. 로/ 미묘하다뇨 미묘하다뇨. 본격 하드SF란 말입니다. :-b

    b/ 지금 현실의 결론도 무섭게 날 듯합니다.

    기/ 근데 철이는 원래부터 뚱뚱했습니다.

  2. 아이고…
    배가 아파요, 너무 웃었나봐요.
    가슴이 아파요, 현실과의 싱크로는 1200%에요.
    라이님은 미혼이 아니시던가요? 벌써 이렇게 현실 적응력이 뛰어나시면, 아이 낳고 어쩌시려고.

  3. 재/ 저는 뉴스나 신문만 봐도 식은땀이 납니다;;;

    톰/ 세상은 언제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다들 어찌어찌 사는 거 같습니다. (폰트가 작아서 그만 오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ㅠ_ㅠ 죄송합니다.)

    하/ 공식적으로는 여드름 약으로 광고합시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