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왕자님

시리우스 왕자님.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 별에서 오신 시리우스 왕자님. 시리우스라는 지구 이름이 아닌 그대의 진짜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저의 못난 지구인 성대는 그대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저의 짧디 짧은 지구 주파수 목소리를 오늘만큼 원망했던 적이 없습니다.

오, 왕자님. 그대는 정녕 고향별로 돌아가셔야만 하는 건가요. 지구에 도착한 첫날 길가에서 비를 맞으며 떨고 계셨던 왕자님을 집으로 모시고 왔던 바로 그 날부터, 오늘까지 함께 했던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은 이제 정말로 영원히 지워져버리는 건가요. 비록 저는 내일 아침 지금까지 왕자님과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깨어나겠지만, 왕자님께서는 수만 광년 떨어진 우주 저 편에서 저를, 그리고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겠죠.

그래요, 그 유치한 이름도 제가 붙여드렸었죠. 시리우스 별에서 온 왕자님의 이름으로 시리우스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비 속에 떨고 계셨던 왕자님의 그 맑은 눈동자는 시리우스 별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났기 때문이랍니다. 13차원 좌표 이동을 통해 블랙홀과 웜홀의 사나운 소용돌이를 지나 머나먼 지구에 유배 오셨던 그 첫날부터, 그래요, 저는 사랑에 빠졌던 건가 봐요.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왕자님께 지구의 말을 가르쳐드렸고, 함께 웃으며 만화책을 읽었고, 인터넷 사용법까지 가르쳐드렸죠. 갓태어난 아기처럼 백지 상태로 제게 말을 배우시던 왕자님께서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저는 정말로 뛸 듯이 기뻤답니다. 부끄럽지만 방 안을 뛰어다니는 제 모습을 보셨으니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세계지도를 펴놓고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지도창을 닫고 별자리표를 열어 시리우스별을 찍으셨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왕자님이 미쳤거나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나 왕자님께서는 목에 걸고 계셨던 펜던트의 뚜껑을 열어 시리우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상현실 홀로그램화면으로 보여주셨죠. 색색의 오로라가 가득한 그 하늘. 우거진 숲과 드넓은 초원. 다채롭고 은은하면서도 신비로웠던 그 향긋한 꽃내음. 비록 아무도 살지 않는 가상현실 속이었지만, 분명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겠죠. 그토록 아름다운 곳은 지금껏 아무데서도 본 적이 없었답니다. 왕자님처럼 아름다운 분을 본 적도 없듯이. 돌이켜보면 비에 홀딱 젖어있는 모습마저도 당신의 고귀한 신분을 숨기지는 못했기에 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신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거겠죠.

이제 시리우스별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평화를 되찾은 백성들이 자기네 별을 다스려줄 왕자님을 다시 찾고 있기에, 오늘밤 드디어 시리우스의 UFO가 왕자님을 모시러 날아올 거라고 하셨지요. 고향별의 소식에 기뻐하시는 왕자님을 보면서 함께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왕자님께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왕좌로 돌아가시는 것이고, 저도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뿐일 테지만, 저의 마음은 왜 이토록 아픈 걸까요.

놀이 기구를 타면서 금발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즐거워하시는 왕자님의 모습과, 그런 왕자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며 우리는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죠. 저 사진도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없는 걸까요. 시리우스의 기술은 정말로 그렇게 시간을 되돌리듯이, 컴퓨터 속에, 카메라 속에 남아있는 다른 사진들까지도 애초에 거기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모두 없앨 수 있는 건가요.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저 사진이 우리들의 거실에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그런 건 싫어요. 생애 처음으로 느껴본 이 행복의 파편이라도 희미한 꿈 속의 기억으로 남겨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제가 조금쯤 기억을 한다고 해서 왕자님을 만나러 시리우스로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왕자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시리우스로 전화를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그린 엉터리 그림들을 칭찬해 주시고, 제가 만든 맛없는 음식들도 맛있게 드셔 주시는 왕자님을 보면서, 저는 철 없게도 이런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만을 바랬답니다. 아니, 그러면서도 저는 내심, 이 꿈만 같은 행복이, 이 꿈보다 더한 행복이 언제 깨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날은 오늘 이렇게 갑자기 정말로 오고야 마는군요. 아, 시간이 여기서 멈추어 준다면 좋으련만! 그 잘난 시리우스의 과학이라는 것도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건가요?

아무리 시리우스의 첨단과학으로 제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하셔도, 저는 당신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에요. 행복의 기억은 무엇으로도 지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왕자님의 얼굴을 기억해내고야 말겠어요. 사진 한 장 못 남겨주시겠다면 상상 속의 어렴풋한 얼굴을 그림으로라도 그리겠어요. 그리고 또 그려서 저만의 사진을 반드시 다시 만들어내고야 말 거에요. 앞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반짝이는 시리우스를 보며 저는 그 미소를 떠올릴 거에요. 제가 왕자님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 티없이 해맑고 밝은 미소. 꿈 속에서라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에요.

이제는 정말로 보내드려야 할 때일 테지요.
다음에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엔 같은 별에서, 아니 같은 은하계에서만이라도 태어날 수 있기를.
왕자님이 계신 곳의 반짝이는 별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볼 수 있을 테니까.

안녕. 시리우스 별의 이름 모를 왕자님.
안녕. 나만의 시리우스 왕자님.

안녕 왕자님”에 대한 4개의 생각

  1. 요즘 동아리방에서 굴러다니던 세계 SF 걸작선을 꺼내 보고 있습니다.

    이게 다 intherye님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대략 시리우스를 강대한 마법 제국으로, 지구를 어딘가 변방의 시골구석으로 치환해도 완벽하게 들어맞는근영. 순정SF와 판타지는 종이 한장 차이인가 봅니다.

  2. 로/ 헐 그거 보고 나서 눈 높아지시면 안되는데;;;;;

    재벌가 사생아로 치환해도 되고, 의문의 전학생으로 치환해도 되고, 외국계 기업의 다니엘 헤니로 치환해도 됩니다. 순정의 세계에 배경 설정은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ㅋㅋㅋ

    음, 본문과 이 덧글이 혹시 순정 장르에 대한 비하로 읽힐까봐 덧붙여두는데, 저도 훌륭한 작품들은 즐겁게 봅니다. 훌륭한 순정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무래도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감정 묘사, 그리고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설정인 듯. 그저 배경 설정에 이토록 구애 받지 않는 장르라니 대단해! 하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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