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골프채

“이봐요, 정신 차려요.”
“끄응…”
“정신이 좀 들어요?”
“끙… 지금이 어디? 여기는 누구? 당신은 언제?”
“2008년 4월 1일. 서울에 있는 이민 사무소에요. 저는 이민 수속을 도와드릴 직원이구요.”

지겹다. 매번 똑같은 일상의 반복.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아니 백 년 후에 타임머신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위대한 발명이 살찌고 무식한 빈민들 구제책으로 쓰일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못생긴 저능아들이 사라진 지구는 타임머신 작동비용을 상쇄시킬만큼 훨씬 쾌적해졌다. 게다가 놈들을 강제로 끌어낼 필요도 없었다. 사실을 약간 예쁘게 포장한 광고만으로도 술술 넘어오는 바보들이 줄을 이었다.

‘필수적인 문명의 이기를 다 갖춘 쾌적한 20, 21세기로 보내드립니다.’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
‘푸르른 잔디 위에서 티타늄 골프채를 휘둘러보세요.’
‘상위 1%의 럭셔리 라이프를 즐겨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명품을 걸치십시오.’

뻔한 광고문구에 꽤 높고 세련된 외양의 빌딩 사진과 그리고 이미 갔던 사람들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 보여주는 사료들을 좀 첨부하면 끝. 심지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사진이라도 좀 높기만 하면 아무 상관 없었다. 아니 피라미드 사진을 찍어서 실어놔도 넘어올 놈들이었다. 따로 자격 조건을 건 것도 아니었건만 가겠다고 하는 놈들은 거의 다 저능아 아니면 거지들 뿐이었으니까.
처음에 정부는 그저 인구 조절 정책의 일환으로 해저 이민, 달 이민과 함께 이 사업-시간 이민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신청자들의 성향이 확연히 구분되자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던 정부도 그 긍정적 효과를 파악하고는 오히려 시간 이민을 인구 조절책 겸 빈민 구제책으로서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말이 구제책이지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격리나 다름 없었다. 비용도 가장 적게 들었다. 해야 할 일이라고는 나 같은 직원을 곳곳에 하나씩 두어서 한 시대에 너무 많은 거지들이 몰리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민시킨지도 벌써 수십년이 흘렀다.

“저는 이제 부자가 된 건가요?”

정신 차리자마자 하는 첫 소리부터 역시나 앞날이 훤했다. 이 놈도 명품과 골프채, 그리고 명품 골프채에 환장하겠군. 솔직히 이렇게 더럽고 냄새 나는 세상에 오고 싶어하는 놈들이 막장은 막장이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놈들은 우리 시대는 물론 이 시대의 센스에도 맞지 않는데 비싸기만 한 옷을 주렁주렁 걸치고, 잘 치지도 못하면서 골프채를 몇 방 휘둘러보고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짓곤 했다. 홍보용 사진을 찍으러 다닐 때마다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 꼴을 보이는 건지, 아니면 평상시 생활이 그런 건지 내가 알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아, 아직 아니에요. 그건 미리 해드릴 수가 없는 문제죠.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겁니다.”

짜식 성질도 급하긴. 부자가 그렇게 쉽게 되는 건 줄 알아? 기껏 공무원이 되어 팔자가 피겠구나 싶었는데 십 년이 넘도록 이 빌어먹을 과거로 매일매일 출퇴근 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가도 한번 타볼까 말까 한 타임머신을 나는 출퇴근 전철 타듯 타고 있다. 처음에는 나도 기절했었고, 몇 달 동안은 골이 띵했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것보다도 매일매일 이런 놈들이나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큰 고역이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나요…?”
“미래에서 온 사람이 부자가 되는 건 아주 간단합니다. 일단 신분증은 여기 만들어드렸구요.”
“네…”
“여기 종이에 써 있는 건 일단 로또라는 복권 이번 주 2등 당첨 번호에요. 나가시면 이 번호로 한 장 사시구요.”
“네… 근데 왜 일등이 아니죠…?”
“복권은 미래에서 온 사람들을 전부 부자로 만들어주기엔 좀 부적절한 수단이에요. 일단 급전이나 약간 타쓰기에 괜찮죠.”

이런 건 좀 홍보책자에 써두면 안되나? 매번 말로 하기도 귀찮아 죽겠다.

“제가 스포츠 역사책을 가져왔는데, 복권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빌어먹을 빽투더퓨처. 첫 출근한지 얼마 안 된 촌놈이었을 때 비디오 가게에서 자기 테이프 형태로 빌려보았던 고전 영화인데, 그 영화 속 악당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병신들은 역시 다른 병신들과 똑같은 생각만 하기 때문에 병신들이다. 넌 겨우 그거밖에 생각을 못 하니까 여기 오게 된 거야, 불쌍한 놈. 책은 이미 세관에서 압수되었을 테니 내가 굳이 뒤져볼 필요도 없었다.

“복권으로는 일단 그냥 급전만 땡겨 쓰시는 거구요. 이 시대에 부자가 되시려면 땅이나 집을 사셔야 돼요.”
“땅이나 집? 그게 돈이 돼요?”
“네, 복권 당첨금으로 일단 작은 집을 사시고, 그 집값이 오르면 되판 다음 더 비싼 집을 사시고, 이러는 걸 몇번 반복하면 금방 부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할 신비로운 방법을 통해 졸부가 될 뚱땡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긴 나도 잘 이해가 안 가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부의 축적이 가능했던 시기가 수십 년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다니. 생산성의 향상을 적절하게 감당해내지 못한 시대의 비극이겠지.

“그게 말이 돼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돈이 생겨요?”
“네, 지금은 그것이 가능한 시대랍니다. 시간 이민 사업의 핵심이죠. 우리는 어느 집이 언제 얼마나 오를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요. 복권과 달리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도 주지 않고 말이죠. 댁 같은 분들의 이민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사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자 여기 이천원 드릴 테니까 어서 나가서 로또부터 한 장 사오세요!”

이천원을 꼬깃꼬깃 손에 쥔 22세기의 거지 하나가 로또를 사러 뛰어나갔다. 이 짓도 이제 몇 년만 더 하면 불가능해지겠지. 후배들은 몇 년 전부터 무슨 증권 거래소로 발령받고 있다던데, 나도 차라리 이꼴 저꼴 안 봐도 되는 거기나 가게 되면 좋으련만. 거기선 거지들한테 최소한 양복은 갖춰입혀서 보낸다던데…

아차, 딴 생각을 하다 깜빡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거지새끼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복권 산 다음 여기로 다시 잘 찾아오셔야 돼요! 가게 이름 잘 봐두고 가세요!”

미래 공인중개사. 줄줄이 늘어선 동종업체들 틈에 끼어있는 내 사무실 위장 간판에 써 있는 이름이었다.

명품 골프채”에 대한 6개의 생각

  1.  우왕 역시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어요. 20년 전에 태어났건 100년 뒤에 태어났건 어차피 죽는 시간은 똑같았을 텐데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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