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비극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이 무슨 4대 비극이네 어쩌네 하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 작품이 어째서 비극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아마도 단순히 젊은 두 남녀의 불꽃 같은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둘 모두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짜 진짜 비극인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의 원작(번역본 포함)이 아니라, 올리비아 핫세*-_-*판과 클레어 데인즈*-_-*판으로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을 접해보았다. 따라서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데, 하여튼 내가 알기로, 그 작품에는 두 집안이 서로 원수인 이유가 안 나온다!

차라리 로미오나 줄리엣의 소위 “조건”이 안 좋아서 상대방 집안의 미움을 받는 거라면, 차라리 줄리엣의 혼수가 모자랐더라면, 로미오에게 애가 딸렸던 거라면, 나이차가 너무 컸더라면, 궁합을 봤더니 크게 흉했다거나, 아니면 심지어 배다른 남매라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악마의 농간이라거나, 그저 단순히 재수가 없었을 뿐이었다면, 원래의 비극, 즉 눈 맞은 젊은 두 남녀의 죽음이라는 비극만이 오롯이 남았을 텐데.

그런데 하필이면 두 집안이 서로 원수라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원수인지는 안 나온다. 그냥 원수다. 애시당초 두 집안이 원수가 된 이유가 필시 있긴 있었을 거다. 6대조 할아버지들끼리 고스톱을 치다가 싸움이 났다던가 하는.

하지만 원래의 이유가 잊혀지고 나면 원수는 그냥 원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가 된다. 서로 다른 이름을 쓰고, 서로 다른 가문의 문장을 쓰고, 서로 다른 차를 타고 다니고, 서로 다른 총을 차고 다니고, 서로 다른 술집에 가기 때문에 원수이며, 서로 원수이기 때문에 서로 미워한다. 원래의 이유는 사라지고, 이유가 아닌 것들이 이유가 된다.

기억할 건 기억하되, 까먹을 건 대충 까먹자. 애들이 무슨 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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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비극”에 대한 5개의 생각

  1. ㅋㅋ 저도 erte 님이랑 같은 댓글 적으려고 했는데 이미 적혀 있네요;;
    사실 저는 예전에 왜 로미오와 줄리엣이 4대 비극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알려지기는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데 4대 비극에 안 들어간다면 희극이라는 뜻인데, 결국 당사자들의 죽음은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둘의 죽음으로 두 가문 간에 평화와 화해가 찾아왔기 때문에 희극으로 치는 것인가? 개인보다 가문을 중시하는 옛날식 사고방식의 결과인가.. 뭐 등등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2. 펄/ 안녕하세요. 아무도 여자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돌연변이 블로거 펄님? ^^

    ㅋㅋㅋ 쪽팔립니다.
    어제 erte님의 덧글에 답덧글을 달고 나니 중학교 때던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어보겠답시고 4대비극이라는 책을 샀다가 목차만 보고 처박아둔 기억이 나더군요. 역시 쪽을 팔아가면서 배워야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4대 비극에 안 들어간다고 해서 희극이 될 필연성은 없죠. 5대 비극이라고 쳐줍시다. 히히.

  3. 혹시 erte님이나 펄님과 같은 지적을 하시려고 방문하신 분들께서는 뒷북이라고 그냥 가지 마시고 부담없이 또 써주시기 바랍니다.

    단, 몰랐던 분께서 이 기회를 틈타 아는 척하시면 골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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