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타 돌리던 아가씨의 아쉬움

오늘도 본격적으로 출근하기 전에 초저녁부터 일찍 나서 퇴근 중인 아저씨들에게 알사탕 + 라이타 + 명함을 돌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퇴근하는 직장인들 틈바구니에서불쑥 나타났다.

그렇게 좋아했던 오빠였건만 벌써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째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손은 부지런히 알사탕 + 라이타 +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김씨부터 황씨까지 아는 남자 이름들을 재빠르게 훑어 넘기고 있었다. 왠지 흘끔흘끔 이 쪽을 쳐다보는 폼이 국민학교 때 좋아했지만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웃집 오빠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약 이십 년 전보다 키도 많이 컸을 뿐만 아니라 솔직히 코도 약간 높였고 눈도 살짝 쨌고 영업용 화장도 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몇 년 씩이나 이웃집에 살았던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오빠인데 어쩌면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걱정만 되는 것이 아니라 왠지 기대도 되었다. 이 쪽으로 자꾸만 다가오는 것이 아무래도 내 얼굴을 알아본 것이 맞는 것도 같고, 못 알아본 것 같기도 한데, 사실을 말하자면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맞긴 맞는 건지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순간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저 사람에게 지금 명함을 줬다가는 오빠가 나를 알아보고 가게로 찾아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못 알아봤더라도, 오늘 밤 잠자리에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오늘 명함을 줬던 그 여자가 혹시 자기가 중학교 때 아무도 모르게 좋아했던 이웃집 예쁜 여자애가 아니었던가 하는 깨달음을 얻고 가게로 찾아올 지도 모른다는 사춘기 소녀 같은 생각마저 들면서 왠지 가슴은 두근거렸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국민학교 때 아무도 모르게 나를 좋아했을 지도 모르는 이웃집 오빠가 가게로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짙은 화장 아래에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나는 비장의 기술을 발동시켰다. 왠지 진상처럼 생긴 아저씨나 빈티 나는 아저씨들에게 주로 쓰는 기술인데 초짜 시절엔 이 기술을 쓸 줄 몰라서 노숙자 같은 새끼한테 머리채를 붙들린 적도 있었다. 머리채가 다 뽑힌 모습을 보고 언니들이 가르쳐줬던 건데 쉽게 말해서 앞 사람에게 명함을 돌린 후 교묘한 시간차 공격으로 절대로 일부러 건너뛰는 것 같아 보이지 않게 진상이나 빈티를 제끼고 그 뒷 사람부터 다시 명함을 전달하는 기술이다. 내가 봐도 참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다. 김연아 점프 뛰듯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이 깔끔하게 넘어갔다.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아저씨는 아무런 낌새도 못 알아차리고 지나간 것 같았다.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금방 서운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다. 세월 때문일까 키 때문일까 코 때문일까 눈 때문일까 화장 때문일까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화장 때문인 것 같다. 20대 초반 같은 피부를 자랑하는 내 쌩얼을 봤더라면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도 분명 나를 알아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시 코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살짝만 세워달랬는데 너무 세워놓아서 안 그래도 속이 상했는데 기어코 오늘 같은 일이 생기고 나니 더 속이 상한다. 살짝만 도로 낮추는 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해야 할 것 같다.

재수술을 위해 추가로 대출 받을 생각을 하며 계속 알사탕+ 라이타 +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다시 나타났다. 실리콘 팩 두 짝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역시 나를 기억해내고 다시 돌아오는 건가 싶은 마음에 고맙기도 했고, 역시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맞나 보나 싶어서 콩닥거리기도 했고, 말을 걸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나 걱정도 들었지만, 갈팡질팡 소녀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내 손은 가게 명함만 열심히 돌려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양새가 역시 알아본 게 맞구나 싶었다. 이제는 퇴근하는 직장인들도 상당히 줄어서 아까 같은 스킬을 다시 쓸 수도 없었다. 콩닥콩닥콩닥콩닥. 콩닥 소리가 네 번 귓가를 울릴 때마다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거의 확실한 아저씨는 내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3미터, 2미터. 1미터…

내 앞을 그냥 지나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날 알아보지 못했나 보다.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역시 아니었나 싶은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왠지 빈티도 좀 나는 것 같았다. 바람결에 생양파 냄새도 살짝 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저렇게 빈티 나는 아저씨가 내가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일리 없지. 이런 생각을 하자 왠지 그 빈티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참 찌질해 보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역시 명함을 안 주길/못 주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코 수술도 안 해도 될 것 같다. 돈 굳었다. 오늘치 명함 챙겨온 게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얼른 마저 돌리고 출근이나 해야겠다. 그 아저씨가 그래도 오빠를 닮긴 닮았었는데. 명함을 다 돌릴 때쯤에는 가물가물하던 오빠의 이름도 떠올랐는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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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백: gaemon's me2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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