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쿨잇

이 책에서 펴는 주장은 간단하다.

  1. “지구 온난화는 현실이며 인간이 일으켰다.” 현세기 끝 무렵에는 결국 인간과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2. “지구 온난화가 가져올 격렬하고, 불길하며, 코앞에 닥친 결과에 대한 주장은 심하게 과장된 경우가 많다.” 그런 과장으로부터 좋은 정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3. 비록 좋은 의도일지라도 터무니없이 노력하기보다는 “지구 온난화에 대해 더 단순하고 더 현명하며 더 효율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실행하는 대규모의 값비싼 이산화탄소 감축 정책은 먼 미래까지도 파급 효과가 적거나 미미한 수준에 그칠 것이다.
  4. “지구 온난화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 균형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세계에는 기아, 가난, 질병 같은 심각한 문제가 무척 많다. 수조 달러를 퍼부어 과감한 기후 정책을 추진하느니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더 많은 사람을 더 저렴한 비용으로 도울 수 있을뿐더러 성공할 가능성도 훨씬 높다.
비외른 롬보르, 쿨잇, 26-27쪽.

저자분께서 대단히 친절하시다!

세상만사 다 귀찮은 분들께서는 이거 네 줄만 읽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셔도 되겠다.

2008년에 읽은 책 중 5권 꼽기

1. 캐치22

올해 읽은 소설들 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심심할 때 읽어보세요.

2. “종의 기원”을 꼽을까 했는데, 이건 어차피 다들 읽으실 테니까, 인기곡 대신 숨은 명곡을 추천하는 빠돌이의 심정으로 인간의 유래

왠 지 고리타분할 것 같아서 미루기만 하다가 2008년에야 다윈의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솔직히 그저 원전으로서의 아우라 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되어 있으리라고 내심 넘겨짚고 있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뻥뻥 내지르고 우기는 책은 아닐까 쪼끔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읽어보니까 킹왕짱입니다. 과장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평생 읽어봤던 그 어떤 것보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기록이 깨질 수 있을 지조차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인류의 모든 책이 들어있는 도서관에 불이 나서 딱 한 권만 구해낼 수 있다면 저는 종의 기원을 들고 나오겠습니다. 마침 올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A.D. 200),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라고 합니다. 올해 안에 꼭 읽어보세요.

3. 회의적 환경주의자

기왕이면 환경 제대로 지키자는 책으로 읽었는데, 분위기를 대충 보니까 환경 안 지켜도 된다는 책으로 까이고 있는 듯하다;;; 헐.

4. 행복의 공식

전에 친구 생일에 러셀의 행복론을 선물한 적 있는데, 올해 다른 친구에게는 이 책을 선물했다.

5. 며칠 전까지였으면 타고난 반항아를 꼽을 뻔했는데, 연말연시에 걸쳐 읽은 “개성의 탄생”으로 변경.

이건 뭐 욕쟁이 할머니가 따로 없음. 설로웨이를 거의 황우석급으로 발라버리네.
그 개성적인 문체만으로도 올해의 책 등극. 다 만 실질적으로 세상에 추가하고 있는 정보면에서는 약간 미흡한 듯. 비유를 하자면 “xx 먹으면 10년을 더 산다!”는 돌팔이 약장수들 까는 것까진 참 유익한데, 끝에다 “인간의 수명에는 순환계, 호흡계, 신경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뭐 이런 걸 덧붙인 느낌. 한국에 허준이 있다면 미국에는 프로이트가 있는 듯.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 “사형 제도에 대한 태도의 유전 가능성은 0.50이며, 조직적인 종교는 0.46, 독서는 0.37이다.”

ps. 벼.. 별로 다독가는 아니라능 !

러시모어산

(…) 카터의 인권정책은 그의 행정부가 광주의 유혈사태에 고작 한가한 항의밖에 하지 않았을 때 카터의 면전에서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한 창의적인 학생의 포스터에는 러시모어산(Rushmore Mount, 워싱턴,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로우즈벨트의 흉상이 조각되어 있는 싸우스다코다 주의 산–옮긴이) 꼭대기에 전두환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는 지미 카터가 M-16소총을 들고 성벽을 지키고 로널드 레이건은 낸시한테 오럴쎅스를 하고 있고 ‘3김’은 그 옆에서 이를 멍청하게 지켜보는 모습이 실려 있었다.

각주. 『사회와 사상』(1989년 3월)에 수록되어 있음.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550-551쪽.

이 그림 실물을 무척 보고 싶은데,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흑흑.
책은 무척 재밌음. 이제서야 수능 보고 밀린 빚을 갚은 느낌…

레골라스와 팅커벨의 차이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어디 판타지 문학이라는 것을 함 읽어보자- 마음을 먹고, 먹자골목에서 원조 식당 찾는 기분으로 ‘반지의 제왕’을 집어들었더랬다. 그때의 괴로웠던 독서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우선 삽화도 없고 해설도 제대로 없는 데다가, 저자가 명확하게 묘사해주지 않는 부분을 스스로 채워넣을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이를 테면, “메리아독”이라는 이름만 딸랑 가지고는 이게 도대체 여자 캐릭터인지 남자 캐릭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중1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존과 메리의 대화에서 메리는 분명 여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메리아독은 메리랑 비슷한 건가? 하는 뻘추측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건 비단 반지의 제왕 뿐만 아니라,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생생하게 접해보지 못한, 생소한 문화권의 이름들이 등장하는 소설 등을 읽을 때마다 다시 겪곤 하는 문제다. 성별을 암시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이나 그, 그녀 같은 대명사가 나오기 전까지 그 등장인물은 머리 속에서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얼굴도 목소리 톤도 없이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조연 호빗들의 경우 이런 간접적인 단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던 캐릭터였던 것 같다. 이래가지고서야 소설의 내용이 잘 이해가 될 리 없다.

거기다가 환타지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하다 보니, 등장하는 종족들도 잘 와닿지가 않았다. “오크”는 워크래프트2를 통해 접해보았던 녹색 괴물을 떠올렸는데 대충 맞았던 것 같고, “난쟁이”는 처음에 백설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 같은 걸 떠올렸는데, 작중에 나름 그들 종족에 대한 묘사를 슬쩍슬쩍 해줘서 조금씩 교정했던 것 같다. 가장 큰 난관은 바로 “요정”들이었는데, (지금이야 그게 아마 엘프와 님프의 차이라는 것인가 싶지만-) 그 때까지 내가 알던 요정이라고는 팅커벨 같은, 날아다니는 조그마한 요정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위풍당당한 숲속 마차 행진 같은 장면에서도 톨킨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크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중에 함께 전투를 치를 때에 이르러서야 아무래도 팅커벨이 쌈을 이렇게 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물리적으로 이치에 닿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면- 독자와 저자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계층에 속할 경우 삽화나 해설이 꼭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헐리우드 만세.

동물권

채식주의
인간 식성의 디폴트는 잡식이다. 조상들이 대대로 고기를 즐겨 먹어왔고, 60억 현생 인류도 모두 잡식의 소화 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오래도록 먹어왔으며, 심지어는 대체로 고기를 아주 맛있어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전제라는 얘기이다. 적어도 완전한 채식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채식주의자는 그런 노력을 들일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해 내야 한다. 게다가 종자에 단백질을 저장하는 콩과 식물의 진화라는 대단한 우연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채식은 불가능했거나, 최소한 훨씬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채식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면 전환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주장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텐데- 국가의 제도로서 존재하는 사형과는 다르게, 채식 자체는 사회 제도로서가 아니라 각자 따로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랫 동안 불교 승려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도구 아닌 목적으로서의 동물 권리 같은 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채식주의’는 그저 일정 지분을 차지해내는 것이 실질적/궁극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겠다.

내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육식에 반대하려면, 아예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동물을 식용 같은 도구적 목적으로 키우지조차 말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동물의 권리이다. 즉, 동물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귀한 생명이며, 식용이라던가 모피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공감이 그것이다.

종차별주의

피터 싱어는 이러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애완동물이나 고등동물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감하며 식용 동물을 예외로 삼는다던가 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고등동물 종차별주의자임;;; 구체적으로는 대충 야생 설치류를 확실히 제외시키고 중대형 포유류를 전부 포함시키는…)

흠, 짚고 넘어갈 것이, 동물의 권리는 대변되는 권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 권리의 수호를 위해서는 동물 권리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 대변자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건 동물뿐만 아니라, 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가난하거나 멍청하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회적 약자인 인간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현대 문명의 필수 기능 중 하나가 아니던가. (동물을 포함하여) 약자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까, 관심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 기능적으로야 후자가 중요하겠지만, 당위성의 문제에서는 전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변자에 의해 대변될 수만 있는 권리라면, 그 선도 좀 확실히 그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하는 말이 재미있기는 해도, 과연 달팽이가 개와 똑같은 의미에서 친구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개와 달팽이가 스스로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개 쪽이 훨씬 더 할 말이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개의 권리를 더 강력하게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는 품게 된다. 그렇다면, 개의 권리를 더욱 강력하게 대변해주는 것이 달팽이에 대한 더러운 종차별주의일까?

그런데 여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쾌고 감수 능력만을 도덕적 근거로 삼는 공리주의이다. 고통은 나쁜 것, 모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식이다. 거기에 동의하더라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도마뱀은 신체 절단 영화를 보면서 일상의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모든 동물의 고통을 차별없이 동일하게 보는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는 공리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의 불살생 자비심에 가깝지 않나 싶다.

고기되기 vs 고자되기
개체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쾌락과 고통뿐일까? 가장 먼저 “번식” 문제가 떠오르는데- 사육 동물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씨암탉과 종마 등등, 번식의 기회가 인위적으로 극소수의 개체에게만 집중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소위 “중성화”된 애완동물은 움직이는 완구하고 뭐가 다른가. 동물들의 고통만큼이나 번식 사정을 고려해주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동물권을 인정한다면 고통을 줄이는 것보다도 자유로운 교미를 가능케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내가 동물이라면 (자체 검열 생략…)
수단과 목적

피터 싱어의 책, 『동물 해방』은 다이어트용이라고 광고했으면 잘 팔렸을 듯… 읽고 나면 (특히 고기에 대한) 식욕이 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 내용이 좀 낡기는 했어도- 포인트는 훌륭하게 잘 잡고 있고, 조금 오바하는 감은 있어도-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주제이기도 하므로, 추천 도서.

내 생각에 이 책의 포인트는 이거다. “우리가 정말로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동물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추상적인 표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닭장 안에 좀 더 많은 닭을 쑤셔넣음으로써, 닭들이 낑겨죽어나가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더라도, 살아남은 닭의 전체 숫자가 늘어남으로써, 총 판매 수익이 최적이 되는 밀도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먹여봤자 소화관만 꽉 채워줄 뿐 판매할 고기의 양을 늘리지 못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 도살되기 전의 동물을 쫄쫄 굶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각종 마루타 실험을 인간 대신 쥐, 개, 침팬지에게 마음껏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새뮤엘 버틀러는 “암탉은 계란이 또 다른 계란을 만드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A hen is only an egg’s way of making another egg)”라고 쓴 바 있다. 물론 버틀러는 자신이 우스갯소리를 하였다고 생각했다. 그 후 프래드 C. 할리(그는 225,000마리의 산란닭을 관리하는 조지아 가금 공장의 공장장이었다.)가 암탉을 “계란 생산 기계”라고 묘사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의 말은 더욱 심각한 내용을 함축하게 된다. 할리는 사무적인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 그 말에 덧붙여 “계란 생산의 목적은 돈벌이다. 이 목적을 잊는다면 계란 생산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잊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영국 영농 잡지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오늘날의 산란닭은 결국 매우 능률적인 전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암탉은 낮은 유지 조건으로 원료(사료)를 최종 생산물(계란)로 바꾸는 기계에 불과하다.
-피터싱어. 동물해방. 191쪽.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커트 보네거트의 “챔피언의 아침 식사(breakfast of champions)”라는 소설에서 읽었던 비슷한 대목이 기억나서 검색해봤다.

“Your parents were fighting machines and self-pitying machines. Your mother was programmed to bawl out your father for being a defective money-making machine, and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bawl her out for being a defective housekeeping machine. They were programmed to bawl each other out for being defective loving machines.
“Then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stomp out of the house and slam the door. This automatically turned your mother into a weeping machine. And your father would go down to a tavern where he would get drunk with some other drinking machines. Then all the drinking machines would go to a whorehouse and rent fucking machines. And then your father would drag himself home to become an apologizing machine. And your mother would become a very slow forgiving machine.”

누군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대충 이런 것이다.

극히 최근에서야 우리는 인간을 수단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이상을 사회 제도 속에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구현해냈다. 이제 동물들도 생각해줘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람답게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줘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