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의 기억

내용은 흥미로웠다. 초파리 얘기만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는데, ebs 교양 프로 한 편 본 느낌. 중간중간 삽화나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

지난번, 핀치의 부리 에서, 인용들이 어째 나중에 끼워넣은 것처럼 따로노는 듯 싶다 그랬는데, 이 책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글을 쓰다가 관련있는 듯한 내용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그걸 또 그때그때 전부 써버리는 것이 조너선 와이너라는 작가의 스타일인 듯. 읽는 사람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나는 별로였지만.

읽다가 마음에 걸린 부분들을 (오탈자는 빼고) 대충 기록해봤음. 대부분이 번역서의 문제였고, 독서를 방해할 정도로 심하다 싶은 문제들도 종종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상당 부분이 번역자 자신보다도 출판사측의 부실한 검토 문제인 듯. 책에 써있는 출판사 홈페이지(www.eclio.co.kr)에 글을 남길까 했는데, 마땅히 남길 곳도 없기에 걍 이 밑에 달아둔다. (사실 이 책을 출판했었다는 사실을 찾을 수도 없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쪽. 감수자 최재천의 추천사.

내가 김동인의 소설 내용을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사람 발가락이 다 거기서 거기 대충 똑같이 생긴 건데, 그런 발가락을 보고 자기랑 닮았다며 위안을 얻는, 오쟁이진 남자 얘기 아니었나. 흠. 누가 자기랑 미남/미녀 배우가 닮았다고 그러면 “그래.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이 닮았다.”며 놀리듯이.
그나저나 최재천 교수의 글은, 읽을 때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 느낌의 원천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는 연단 위의 교장선생님을 연상케 한다.

갓 태어난 거위 새끼는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자를 보고 왼쪽으로 움직이면 어미 거위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매로 인식한다.어미 거위의 그림자를 보고는 겁을 먹지 않지만 매의 그림자가 싶으면 재빨리 달아난다.
27-28쪽.

목이 길고 꼬리쪽이 짧은 어미 거위, 목은 짧고 상대적으로 꼬리쪽이 긴 매, 따라서 대충 뭐 이렇게 –x- (x는 날개) 생긴 그림자 그림 한 장이라도 넣어줬어야지. 그냥 왼쪽 오른쪽이라고 말로만 설명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임? 나야 딴데서 이 얘기를 그림과 함께 본 적이 있어서 무슨 얘긴지 대충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뭥미 했을 듯. 작가에게, 그림 안넣고 글로만 묘사하는 데에 무슨 강박이 있나 싶음.

기원후 2세기 그리스의 의학자 갈렌(…)
33쪽.

별거 아닌데, 갈렌->갈레노스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그 비밀을 품고 있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셰익스피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1612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 『폭풍우 The Tempest』에서 프로스페로(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작가 자신과 가까운 인물. 모든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의 원형)는 자신의 양자 칼리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악마놈, 그놈은 악마야. 타고난 악마.
아무리 가르쳐도 그놈의 천성은 고칠 수 없단 말야.

34-35쪽.

이건 명백히 번역자의 잘못. 바로 앞에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의 셰익스피어 얘기를 하고 나서 등장하는 인용문인데, 정작 인용된 내용 속에는 본성이나 양육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돼? 앙? 내가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구글로 막 스펠링도 어려운 셰익스피어를 영어로 쳐넣는 고생 끝에 직접 원문을 찾아봤어. “A devil, a born devil, on whose nature Nurture can never stick”이라고 나오네. “악마, 타고난 악마, 그 본성에, 양육이 도통 안 먹히는 놈” 뭐 이런 얘기인 것 같아. 물론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은 이렇게 어거지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전문 문학번역자의 번역을 찾아옮기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단어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인용의 경우엔 최소한 원문을 같이 실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거 아닐까? 읽는 사람 벙찌잖아. 그렇다고 어떤 번역본을 인용했는지 밝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블 벙찜…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
71쪽.

역주에 약간 의문. 선불교 승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라고 하기보다는. 음.

길게 꼬인 분자 사슬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 천문학자들 눈에 비친 행성의 모습이나 20세기 초반 물리학자들이 바라보던 원자의 모습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댈 수도 없는 작은 점일 뿐이었다.
73쪽.

현미경으로 행성 보신 적 있으세요? 본 적 없으면 말도 하지 마세요.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다윈은 런던동물원에서의 실험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나는 런던동물원의 아프리카산 큰 독사 앞에 있는 두꺼운 유리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뱀이 갑자기 달려들어도 절대 놀라서 뒤로 물러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내 결심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뒤로 펄쩍 물러났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이성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험을 상상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14~115쪽.

이건 문제점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했던 비슷한 짓이 떠올라서 재미있길래 기록해둠.
https://intherye.wordpress.com/2006/03/31/injection/
다윈이랑 같은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ㅋㅋㅋ

어느 날 교수회의에서 윌슨이 생태학자를 한 명 더 채용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윌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신이 나갔답니까?”/”무슨 뜻입니까?”/”생태학자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18쪽.

둘 중 하나(아마도 후자)는 왓슨일텐데. 번역하면서 둘 다 윌슨으로 써버리는 실수를 한 듯. 혼자 정신 나간 듯이 자문자답하는 꼴이 됐다.

그는 한 식물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꽃의 속명을 지었다는 사실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더구나 그 꽃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 『내 인생의 추억 Memories of My Life』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 우생학에 대한 간단한 설명 몇 줄과 함께 ‘갈토니아 칸디칸스’의 그림을 조그맣게 삽입했다.
131쪽.

여기서 “그”는 골턴. 역자는 인명과 학명을 한글로 옮길 때 골턴Galton과 갈토니아Galtonia와의 연관성을 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암수가 한 몸인 이 초파리는 그리스어 ‘여성gyne’과 ‘남성andr’을 따서 ‘자웅모자이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174쪽.

‘여성gyne’+남성andr’ = ‘자웅모자이크’ -_- 이 역시 원문 병기가 필요한 부분.

그 명판 위에는 수컷 초파리 다리에 있는 성즐(수컷 초파리의 앞다리에 있는 까만점-역주)의 현미경 사진을 붙였다. 수컷은 성즐을 이용해 암컷에 달라붙는다.
211쪽.

역주가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 까만점 가지고는 암컷은커녕 어디에도 달라붙을 수 없으니. 성즐이라는 것이 그저 까맣기만 한 점 같은 것이 아닐 거라는 걸, 나 같은 문외한도 내용만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어딘가에서 베껴오는 역주라는 삘링…

213쪽 이후에 계속 나오는 ‘피리어드’ 유전자는 158쪽에서 ‘주기period’라고 불렀던 유전자와 같은 것인 듯. 겨우 몇십 페이지 떨어져 있다고 용어통일에 실패하면 찜찜하지.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복제생물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217쪽.

복제생물이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 말이 안 되잖아. 역시 원문 병기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인데 번역자가 홀랑 빼먹었다.

“나는 스물세 번째 호메오박스(초파리의 호메오틱 선택 유전자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염기배열-역주)는 연구하고 싶지 않다.”
309쪽.

또 하나의 있으나마나 한 역주. 龍(용 용). 뭐 이런 느낌.

핀치의 부리

왠지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 떠는 느낌. (나 아무래도 도킨스에게 단단히 세뇌된 듯…) 그러니까 현재진행중인 진화를 목격하고 있다는 호들갑. 근데 과연 그럴까? 핀치 자료를 들이밀면 진화를 못 믿던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당신은 손톱이 자라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깎아보면 아는 거지 무얼.

부리의 1쩜 몇 미리 차이가 생사를 결정지었다고 감격하던데, 평균의 차이가 그 정도라면, 죽고 살은 집단간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얼마나 됐을지 조금 궁금했음.

스타일에 있어서도, 중간중간 고전 인용도 왠지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나중에 폼나라고 끼워넣은 것처럼 따로 노는 듯했음. 쩝.

나방 색깔이나, 물고기 색깔이나, 핀치의 부리 길이가 오락가락한다던가 하는 것은, 물론 자연선택의 작용인 것이 분명하지만, 창조론자 입장에서는 신이 설계한 원형prototype이 그 정도쯤은 가변적이었다고 선언해버리면 그만일 듯. 실제로도 새로 나타난 형질이라기보다는, 유전자 속에 숨어있던 과거의 형질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다시 나타난 것을 목격한 것에 불과할 가능성도 꽤 있다고 생각하고. 창조론자의 입장에서 목격하고 싶은 “진화”는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그런 진화지. 따라서 여전히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자연 상태에서는. 지성과 기록의 역사가 일이만년 안에 끝장나지는 않기를 바랄 수밖에.

말 나온 김에, 나 같이 집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무언가가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설득당한다. 실제로 검증하는 것을 강조하는 이 책에서는 이런 걸 좀 흉보지만. 어쨌든.

더글라스 아담스 형이 이런 독실한 마음가짐을 아름답게 표현한 바 있는데, 다음과 같다.

Anything that happens happens, anything that in happening causes something else to happen causes something else to happen, and anything that in happening causes itself to happen again, happens again. Although not necessarily in chronological order.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고,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일이 다른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다른 일을 일어나게 하고,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일이 스스로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은, 다시 일어난다. 굳이 꼭 시간순서대로일 필요는 없다.

진화 오라토리엄까지는 아니더라도, 진화 텅트위스터쯤은 되는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진화를 떠받드는 무신론자인 이유를 셜록 홈즈께서 아름답게 표현한 바 있는데, 다음과 같다.

“When you have eliminated all which is impossible, then whatever remains, however improbable, must be the truth.”

“불가능한 것들을 모두 제외시키고 나면, 남아있는 것이, 아무리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

[펌] 부랑자 중산층

“쓰레기 같은 부랑자들을 동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이들을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길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쓰레기, 쓰레기니까요.”

흥미롭게도 그는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교묘하게 차별화했다. 그는 6개월 동안이나 떠돌아다녔으면서도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자신만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의 몸은 비록 구빈원에 있지만 정신만은 하늘 높이 솟아 중산층에 속해 있었다.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라는 책 138쪽에 실린 ‘구빈원’이라는 제목의 글 중에서.

국개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또 다른 국개론 즉, 민이 (우물 안) 구리을 주장하고 싶어진다.

국개론은 모든 사회 활동의 전제일지언정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적 어려움 같은 변명 뒤에 숨고 싶어질 때에는 구체적인 기한을 두는 것을 추천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하는 게 낫다.

나도 “정직한 글”을 쓰고 싶다. 아직까지도 그게 컴플렉스다.

회의적 환경주의자

평소에 건전한 상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하옵는 YY님께서 무려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믿음들이 산산히 깨지고 있다”고 하신 책이라서 긴장하고 집어든 책. 읽고 나서 나는 안 깨졌지롱, 안 깨졌지롱, 메롱메롱, 얼레리꼴레리 잘난 척하려고 그랬는데, 내 상식도 깨졌다;;;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이라서 쫄았는데, 슬쩍 들춰보니 777쪽부터는 주와 참고문헌이라서 안심. 휴-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분들께서는, 1부의 두 장(“상황은 개선되고 있다”, “왜 좋지 않은 뉴스뿐일까”)이랑(53~144쪽), 한 장짜리 6부 마지막 장 “곤경인가 진보인가”만이라도 읽어보세용. (721~775쪽) 요즘의 광우병이나 GMO 관련해서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책인 듯.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흠, “겁주지 말란 말이야!”라고 할 수 있겠다.

하긴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어릴 때 읽은 어떤 책에서는 석유와 금속 같은 모든 자원들이 곧 고갈될 거라는 사실을 그래프로 그려서 보여줬었다. 대기오염이 심각해지고 있다고들 그러면서, 수십 년 전의 사례를 들더라고. 설마 내가 낚였을 줄이야. ㅠ_ㅠ 하긴, 자기만은 낚이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언제까지나 낚인 줄도 모르고 펄떡펄떡거리는 거겠지.

요즘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쿨게이쿨게이 그러면서 열내시는 분들이 읽는다면, 저자를 보고 이건 뭐 쿨게이 정도가 아니라 프리징-마이-볼스-오프-게이라고 부를 듯. 줄여서 알게이라고 하자. ㅋㅋ

이를 테면, 아이작 아시모프나 에드워드 윌슨의 말도 그냥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가 없다니, 난 이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 ㅠ_ㅠ 싶은 마음도 솔직히 들었음. 믿을 건 숫자뿐… -,.-

자유무역 압박이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의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장하준의 비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종종 있었음. 지들은 일찌감치 보호무역도 다 해먹고, 환경도 다 해먹은 선진국.

330쪽. 자원 고갈 파국론자들과의 내기 이야기는, 왠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연상케했음. 파국론자들 중 적어도 세 명은, 나름 거액의 돈 내기에 응할 정도로 파국론을 정말로 믿고 있다. 차라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다루기 편할텐데 말이지.

민주 정부가 과연 근거 없는 괴담에 좌우되지 않는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글쎄… 비합리적인 대중의 감정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흠.

[비추] 라이프 온 마스

얼마 전에 어떤 잡지에서 라이프 온 마스라는 영국 드라마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관심이 땡겨서 한번 디벼봤는데… 결론은, 낚였다!

날 낚았던 그 기사를, 대충 다시 기억해 보자면- 무슨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과거 1973년으로 가게 된 주인공 형사(왠지 이름이 멋진 존심 John Shim 닥터의 라이벌 마스터 역으로 왠지 친근한 배우.)가 1) 전근대적 수사를 하고있는 현지 경찰들을 무슨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수사기법으로 조금씩 감화시켜가는 드라마라는 식으로 설명해놨었음. 2) 게다가 무슨 첫 화에서 현재의 애인을 납치해간 범인을 혼수상태의 과거에서도 다시 만나게 된다는 얘기를 스토리상의 중요한 줄기인 것처럼 언급해놨음.

그런데 막상 두 시즌을 다 보고 나니, 1) 감화는 개뿔. 그냥 티격태격만 하는 거잖아. 딱히 아무도 감화되지 않음. 좀 감화된다 치더라도 극중에서 전혀 주요한 요소가 아님. 2) 그 범인은 그냥 떡밥만 던져놓고 아무런 마무리가 안 됨. 3) 게다가 여주인공이 솔비를 닮았음. 그 소개글을 썼던 작자는 필시 첫 화만 대충 보고 겨털로 써갈겼다는 데에 300원 걸겠다.

게다가 이 시리즈는, 내가 픽션을 즐기고자 할 때 가장 싫어하는 요소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니, 그 첫번째가 바로 “아시발쿰”이요, 두번째가 바로 “독자들의 몫^^”이다. 아마 나만 싫어하는 게 아닐 듯. 이 두가지는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급으로 피해야 할, 아주 전형적인 얄팍한 마무리 수법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시발쿰”은, 꽤 유명했던 “도라에몽 자폐 환상 결말 낚시”를 떠올리시면 되고, “독자들의 몫^^”은 말 그대로 결말을 애매하게 지어놓고 알아서들 해석하라는 직무유기를 일컫는 내맘대로 어휘이다.

“아시발쿰”이나 “독자들의 몫^^” 같은 어이없는 결말이 의의가 있게 사용되는 경우는, 그게 작품 자체의 주제인 극소수의 경우 말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ex. 호접몽, 블레이드 러너?)

라이프 온 마스의 경우, 이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_- 결합하여, “아시발쿰인지 뭔지 하여간 시청자들의 몫^^”이라는 열불 터지는 결말을 내고 있다.

어쩌라고…

이 시리즈를 즐길만한 이유가 있다면, 영국인들이 한 세대 전을 돌아보며, “우리 사는 세상 참 많이 좋아졌구나 저땐 저랬지 흐뭇흐뭇”하는 거 정도라고 봄. (+존심빠 2%) 즉, 난 괜히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