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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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 골드버그 기요틴 -7-

유물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트에서 주부에게 팔려나가기 전에 제품의 제조 과정에서는 물론 표의 대량 도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형을 촉구하는 푸딩을 사든 사형에 반대하는 푸딩을 사든, 그 푸딩들이 담겨있는 플라스틱 용기는 똑같다. 푸딩 제조업자는 플라스틱 제조용기 업자에게 용기를 대량으로 구매하는데, 물론 이 때에도 푸딩 제조업자는 당당한 소비자로서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 이를 테면 가장 싼 값에 푸딩 용기를 제공하는 제조업자가 우연히도 사형을 촉구하는 용기를 판매하고 있다면, 애석하게도 사형에 반대하는 푸딩을 구매한 소비자 입장에서는, 알맹이는 반대하지만 껍데기는 촉구하는 우스운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다. 더욱 얄궂은 일은, 이 플라스틱 용기 제조업자 역시 소비자로서 석유에서 추출한 원재료를 구매해야 하는데, 이 때 사태는 또 한번 꼬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원자재 판매자는 석유를 사오는데……

 
상품의 종류에 따라 이러한 단계가 매우 여러 차례 겹치기도 하며, 이를 파생 투표라 부른다. 과거 이러한 파생투표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한 단계가 늘어날 때마다 실질적인 영향력은 지수적으로 감소하여 어쨌거나 최종 거래 가격 근처에서 수렴하는 결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생 투표에는 커다란 헛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중간 제품 유통 시점과 최종 상품 구매 시점과의 시간차다. 간단하게 말해서- 푸딩은 금세 썩지만, 용기는 오래 동안 썩지 않는다. 푸딩을 담아 팔기 오래 전부터 플라스틱 용기를 대량으로 구매해서 쌓아둘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떤 푸딩 제조회사는 실제로 약 150년치 플라스틱 용기를 지하 창고에 쌓아두고, 새 지하 창고를 파고 있다고 한다. 그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회사에 원재료 제공하는 어떤 큰 화학회사는 석유회사로부터 유전 수십 개 분량의 석유를 미리 사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석유 회사는 항성간 여행이 언젠가 발명될 것에 대비하여 가까운 항성계의 부동산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결과물은,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미리 예약 당선되어 있는 민주 정부다. 원래 민의란 이런 식으로 반영되는 것.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결제/투표 시스템에는 자동 프로그램이 심어져 있는데, 이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구체적인 정치적 표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제품을 사는 경우, 그 사람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보여온 구매 패턴을 분석하여, 이번에 내는 돈은 과연 어느 쪽에 투표해야할 지 즉석에서 자동으로 대신 결정해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외국에서 사오는 제품을 대상으로 공항 검색대에서 실시되었던 제도인데, 그 정확한 예상 능력이 호평을 받고 현재 그 영역을 계속 넓히고 있다.
 
현대 사회에 각각의 시민들이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 정치적 판단을 요구하는 사항들은 셀 수 없이 많고 또 계속 많아지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 모든 판단을 일일이 해가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음 주에 달에 사는 누군가를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사소한 문제들이 수천 수만 가지를 넘기 시작하면- 매번 책임감 있는 판단을 기대하기란 어려워진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동 프로그램에 의한 대리 투표다. 그래서 아무런 딱지도 붙어있지 않은 푸딩이 푸딩 중에 가장 많이 팔리고 있으며, 동네 소매점에서는 이런 푸딩만 취급하기도 한다. 이런 푸딩을 사는 수 많은 사람들의 구매 패턴 분석 결과는 물론 대부분이 사형에 대한 적극적인 찬성, 또는 소극적인 찬성쪽을 가리키고 있다. 이 편한 세상.
 
직접적인 구매 행위에만 표값이 매겨지는 것은 아니다. 각종 매체에 싣는 광고에도 당연히 가격이 매겨진다. 광고주가 지불하는 돈이 어느 쪽에 투표될 지에 대한 판단의 권리는 전적으로 소비자에게 달렸다. 예를 들어 브라우저를 통해 어떤 사이트에 얼마나 자주 방문하는지, 그리고 어떤 검색어를 입력하는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영화를 보는지- 이런 모든 자료는 중앙 서버로 전송되어 분석되고, 허용할 수 있는 오차 내에서 대리 판단하여 투표까지 대신해준다.
 
투표의 근거가 되는 데이터는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를 얼마나 세세히 기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전부 다 기록한다.
 
얼마나 많이 기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이것이 약간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과거의 웹사이트 방문 내역 따위를 과연 어디까지 소급해서 적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기록이 남아있는 데까지 모든 자료를 수집하다 보면 오래 전의 초기 기록까지 어디선가 튀어나오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들어지는 모든 정보를 기록하고 있으며, 친족이나 친구들의 기록까지 분석에 반영하고 있는 현재의 정책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기록도 반영해야만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지하 깊은 곳에서 발견된 자기 테이프에서는, 까마득히 먼 과거 어떤 개인이 블로그-일종의 원시적인 실시간 뇌파 기록 장치-에 끄적거린 사형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픽션이 발견되었다. 그 픽션을 쓴 사람이나, 그 픽션을 읽은 방문자들의 반응 같은 것도 현재의 자동 투표 프로그램을 위한 자료로 반영해야 할까? 반영하는지 하지 않는지 소비자들이 알게 되면 그 자체가 결과를 뒤바꿀 수도 있는데, 결과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또 다시 결과가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끝없는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반영하고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당시에 이미 오늘날과 같은 자동 구매/투표 체계가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세부 메커니즘은 다를 지 몰라도 기본적인 발상과 결과는 똑같았다는 것이다. 당시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랍시고 내세우면서. 그 중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이것이 민주 정부 뿐만 아니라 한두 세대 이상 지속된 모든 성공적인 정부들의- 왕정이나 공화정은 물론 원시 부족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인간 사회의 구성 원리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아무렴.
요즘엔 그런 음모론도 떠돌고 있다.

라이타 돌리던 아가씨의 아쉬움

오늘도 본격적으로 출근하기 전에 초저녁부터 일찍 나서 퇴근 중인 아저씨들에게 알사탕 + 라이타 + 명함을 돌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퇴근하는 직장인들 틈바구니에서불쑥 나타났다.

그렇게 좋아했던 오빠였건만 벌써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째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손은 부지런히 알사탕 + 라이타 +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김씨부터 황씨까지 아는 남자 이름들을 재빠르게 훑어 넘기고 있었다. 왠지 흘끔흘끔 이 쪽을 쳐다보는 폼이 국민학교 때 좋아했지만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웃집 오빠도 내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약 이십 년 전보다 키도 많이 컸을 뿐만 아니라 솔직히 코도 약간 높였고 눈도 살짝 쨌고 영업용 화장도 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몇 년 씩이나 이웃집에 살았던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오빠인데 어쩌면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걱정만 되는 것이 아니라 왠지 기대도 되었다. 이 쪽으로 자꾸만 다가오는 것이 아무래도 내 얼굴을 알아본 것이 맞는 것도 같고, 못 알아본 것 같기도 한데, 사실을 말하자면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맞긴 맞는 건지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순간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저 사람에게 지금 명함을 줬다가는 오빠가 나를 알아보고 가게로 찾아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못 알아봤더라도, 오늘 밤 잠자리에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오늘 명함을 줬던 그 여자가 혹시 자기가 중학교 때 아무도 모르게 좋아했던 이웃집 예쁜 여자애가 아니었던가 하는 깨달음을 얻고 가게로 찾아올 지도 모른다는 사춘기 소녀 같은 생각마저 들면서 왠지 가슴은 두근거렸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국민학교 때 아무도 모르게 나를 좋아했을 지도 모르는 이웃집 오빠가 가게로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짙은 화장 아래에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나는 비장의 기술을 발동시켰다. 왠지 진상처럼 생긴 아저씨나 빈티 나는 아저씨들에게 주로 쓰는 기술인데 초짜 시절엔 이 기술을 쓸 줄 몰라서 노숙자 같은 새끼한테 머리채를 붙들린 적도 있었다. 머리채가 다 뽑힌 모습을 보고 언니들이 가르쳐줬던 건데 쉽게 말해서 앞 사람에게 명함을 돌린 후 교묘한 시간차 공격으로 절대로 일부러 건너뛰는 것 같아 보이지 않게 진상이나 빈티를 제끼고 그 뒷 사람부터 다시 명함을 전달하는 기술이다. 내가 봐도 참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다. 김연아 점프 뛰듯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이 깔끔하게 넘어갔다.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아저씨는 아무런 낌새도 못 알아차리고 지나간 것 같았다.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금방 서운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다. 세월 때문일까 키 때문일까 코 때문일까 눈 때문일까 화장 때문일까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화장 때문인 것 같다. 20대 초반 같은 피부를 자랑하는 내 쌩얼을 봤더라면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도 분명 나를 알아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시 코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살짝만 세워달랬는데 너무 세워놓아서 안 그래도 속이 상했는데 기어코 오늘 같은 일이 생기고 나니 더 속이 상한다. 살짝만 도로 낮추는 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해야 할 것 같다.

재수술을 위해 추가로 대출 받을 생각을 하며 계속 알사탕+ 라이타 +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다시 나타났다. 실리콘 팩 두 짝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역시 나를 기억해내고 다시 돌아오는 건가 싶은 마음에 고맙기도 했고, 역시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맞나 보나 싶어서 콩닥거리기도 했고, 말을 걸면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나 걱정도 들었지만, 갈팡질팡 소녀스러운 마음과는 달리 내 손은 가게 명함만 열심히 돌려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양새가 역시 알아본 게 맞구나 싶었다. 이제는 퇴근하는 직장인들도 상당히 줄어서 아까 같은 스킬을 다시 쓸 수도 없었다. 콩닥콩닥콩닥콩닥. 콩닥 소리가 네 번 귓가를 울릴 때마다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거의 확실한 아저씨는 내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왔다. 3미터, 2미터. 1미터…

내 앞을 그냥 지나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날 알아보지 못했나 보다.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가 역시 아니었나 싶은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왠지 빈티도 좀 나는 것 같았다. 바람결에 생양파 냄새도 살짝 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저렇게 빈티 나는 아저씨가 내가 국민학교 때 좋아했던 이웃집 오빠일리 없지. 이런 생각을 하자 왠지 그 빈티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참 찌질해 보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역시 명함을 안 주길/못 주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코 수술도 안 해도 될 것 같다. 돈 굳었다. 오늘치 명함 챙겨온 게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얼른 마저 돌리고 출근이나 해야겠다. 그 아저씨가 그래도 오빠를 닮긴 닮았었는데. 명함을 다 돌릴 때쯤에는 가물가물하던 오빠의 이름도 떠올랐는데.

아쉬웠다.

루브 골드버그 기요틴 -6-

요즘엔 그런 음모론도 떠돌고 있다.

마트에 간 주부가 상품을 골라 카트에 담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은 품질이나 가격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다. 이를 테면, 유기농 표시(금연 표시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꽁초 대신 좀비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가 붙은 푸딩을 살 것인가, 비유기농 표시(싱글벙글 웃고 있는 동전 그림이 그려져 있다.)가 붙은 푸딩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식품에 붙는 각종 인증 표시들은 처음에는 해당 식품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사항들에 관해서만 표기하곤 했다. 예를 들어 비타민씨가 들어있다거나, 칼로리가 적다던가 하는.

그러다가 약간 쓸데없다 싶은 것들까지 붙이기 시작했다. 이 베이컨이 된 동물이 살아있을 적에 홍삼 달인 물을 타먹였다거나 하는.

그 즈음에, 해당 상품과 딱히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들에 관한 표시들도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제조과정에서 제3세계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지는 않았다던가, 중금속을 배출하지 않았다던가 하는 표시, 그리고 전체 수익금의 영쩜 몇퍼센트는 특정 질환 환자나 특정 국가, 또는 포장에 사진과 간략한 신상이 써있는 어느 소년소녀가장처럼 하여튼 돈이 필요할 듯한 누군가를 위해서 쓰겠다는둥 하는, 어딘가 쫌스러운 표시 같은 것도 등장했다.

이런 기묘한 판매 방식이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드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 한 가정 주부는 현대 자본민주주의의 1원1표 원칙에 따라 소중한 1표의 권리를 총 43940원 어치 행사했다. 그녀가 장바구니에 수북이 담은 물건들은 다음과 같다.

현재 대통령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에서 만든 소세지: 대통령의 활짝 웃는 얼굴 로고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현재 대통령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만하면 일을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통령의 매출/득표 순위는 십칠년째 1위를 달리고 있다. 이기는 편에 붙는 건 언제나 안도감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을 준다. 주말에 교회에 영수증을 가져가면 일정비율 헌금에서 공제도 해줄 것이다.

이 동네에 공원을 만들기 위한 기금을 마련한다는 표시가 붙어있지만, 사실은 공원 부지를 핑계로 동네 집값 상승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인 임대 아파트 단지를 몰아내기 위한 기금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지역 제조 웰빙 상표가 붙어있는 두부. 깨알같이 현재 시의원의 재선에도 도움을 준다고 써있다.

그리고 사형을 촉구하는 푸딩: 국민 모두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푸딩을 아무도 사지 않음으로써, 이론상, 언제든지 사형을 폐지할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이리라.

그 외 아무런 기부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차익을 상품 가격으로 고객들에게 돌려드린다는 표시가 붙어있는 음료수 따위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처럼 상품의 구매를 정치적 투표와 연계시킨 정책의 최대 장점은 바로 실시간 집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 이 가정주부가 신용카드로 결제를 한 순간, 구매한 상품의 정보는 정부로 전송되어 1) 소세지 값은 자동으로 소숫점 아래 몇 자리 초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현직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시켜주었고, 2) 두부 값은 그 주부가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상승시켜주었을 것으로 기대되며, 3) 푸딩 값은, 이 푸딩을 먹을 아이가 타고 있는 놀이터 시소에 달린 센서에 전원이 들어오게 하였다.

모든 사형은 이렇게 시작된다.

루브 골드버그 기요틴 -5-

모든 사형은 이렇게 시작된다.

초등학교 체육시간,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신성한 시민의 의무를 지우는 것은 평생 지속될 시민의식을 고취시켜주는 데 도움이 되는 훌륭한 교육 정책이다. 아직 투표권도 없는 이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채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것 정도인데, 그 쯤이야 나중에 커서 알려주면 될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해본 일에는 쉽게 익숙해질 수 있으니까. 알고 했는지 모르고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여기 두 아이가 시소를 탄다. 쿵덕쿵. 쿵덕쿵. 시소에 내장된 정밀한 저울이 양쪽 아이 각각의 몸무게를 측정한다. 소수점 둘째자리부터 네째자리까지 숫자 세 개는 적절한 단위-아마도 ppm-가 붙어서 조개 수프에 들어갈 중금속 함량으로 사용될 것이다. 굳이 이렇게 의미없는 숫자를 쓰는 것은, 아이들의 몸무게라는 것이 대충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한 여자 아이는 혼자서 흔들흔들 그네를 탄다. 그네 줄 끝에서는 그네가 움직이는 속도를 계산한다. 의미없는 미세한 단위의 숫자는 적절하게 가공되어 빵 속에 농약 성분을 얼마나 집어넣을지 결정짓는 데 쓰인다.

다른 아이는 목이 마른지 수돗가에서 콸콸콸 쏟아져나오는 물을 마시고 있다. 수도 꼭지에 달린 계량기는 매초 쏟아져나오는 물의 부피를 잰다. 비슷하게 가공된 숫자는 고기의 초과 조리 시간을 결정한다.

이러한 정책이 알려지자 처음에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우선 아이들이 직접 사형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간접적으로 미미한 영향만 미칠 뿐이라는 점,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아이들의 몇 가지 행동만 그때그때 표본으로 이용될 뿐이라는 점, 무엇보다도 아이들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센서들이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는 점 등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법원을 설득시킬 수 있었고, 따라서 학부모들도 설득시킬 수 있었다. 어떤 학부모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테니 봉사활동 점수에 반영해달라며 조르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아이들을 이렇게 난수 발생 함수 대용품으로 이용해먹어도 되는가-하는 칸트스러운 난제만 남았다. 물론 이런 까다로운 문제에는 논술 공부하는 입시생들 말고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한편 교실 구석에 홀로 남아 휴대용 게임기 조작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자기 자식을 사람 죽이는 과정에 참여시키고 싶지 않다는 사형 폐지론자들의 왕따 자식들을 위한 대체 수업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단순한 게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가는 사형수의 바이탈 사인은 추상화를 거쳐 달과 지구 사이를 너머 접시 돌리기 게임 온라인 서버로 전송되어 마침내 게임 화면의 흔들거리는 접시로 실시간 구현된다. 휘청거리던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면 점수를 잃는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떨어지기 직전의 접시들을 다시 빙글빙글 돌리는 것 뿐이다. 확실히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살려두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둘씩 떨어지는 접시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자식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싶어하는 학부모의 뜻을 받들어, 접시들은 의인화되어 눈코입이 달려 있다. 접시는 깨질 때 단말마의 비명을 꽥하고 지르고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이렇게. X-b

그렇게 달 형무소 토요일 특식의 성분 배합 비율이 결정되었다.

루브 골드버그 기요틴 -4-

그렇게 달 형무소 토요일 특식의 성분 배합 비율이 결정되었다.

이제 남은 절차는 헌법에 따라 사형 집행 전에 대통령의 인가를 받는 것 뿐이다. 그런데 솔직히 대통령의 일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많다. 반드시 대통령 업무 자동화 시스템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해당 분야에 많은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정보혁명을 이끌었던 대통령을 기리는 뜻에서, 대통령 업무 자동화 시스템의 이름은 여전히 민주주의 2.0이라고 부르고 있다.

업무 자동화는 성숙한 민주주의와 정보 처리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접목되어 이룰 수 있었던 현대 사회의 쾌거이다. 현재진행중인 이 현상을 두고 (근육을 대체한 산업혁명에 비유하여) 정보혁명이라고 부른다. 그 주요 내용은 물론 두뇌의 대체.

물론 처음에는 통장형 대통령이 있었다. 국내외의 모든 일에 참견하고도 시간이 남아돌던 대통령. 그러나 인구가 어느 정도 불어나고 사회가 복잡해지자 이것이 불가능해졌다.

일이 한 사람의 업무 한계량을 막 초과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대통령의 모든 업무가 사안을 열심히 요약 설명한 다음 O/X 퀴즈 형식으로 끝을 맺는 두꺼운 보고서 끄트머리에 서명을 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처음엔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업무 효율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사소한 변화로는, 서명 대신 두 개의 만년도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다행히도 이 시기에 컴퓨터가 각 가정과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에도 보급되어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결제 서류의 전자문서화와 전자서명의 도입은 정치 분야의 보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게다가 대통령 집무실의 종이뭉치가 전자문서로 전환될 때 쯤에는, 그 곳에 절실히 필요한 소프트웨어도 이미 다른 용도로 완벽하게 개발되어 있는 상태였다. 스팸 메일을 걸러내기 위한 상업용 스팸 필터가 바로 그것이다.

스팸 필터의 기본 기능은 내용물의 패턴을 인식하여 뻔하디 뻔한 것과 별로 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는 것이다. 이 능력은 이전 냉전 시대의 국가 경쟁 상황에 비견할만한, 활발한 초국가적 시장 경쟁 덕분에, 당시의 하드웨어로 도달 가능한 한계치를 이미 넘어서 있었다. 그리고 업무량이 점점 늘어나기만 하던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덕분에, 이름이나 수치 같은 세부적 내용만 약간씩 다를 뿐 하루 세번 끼니 때마다 꼬박꼬박 날라오는, 달에 사는 어떤 나쁜 놈의 통계적 사형 집행 승인 명령서에 전자 도장을 찍는 것 같은 일은, 대통령이 직접 하지 않아도, 완전히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몇 단계의 메뉴 조작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예 초기화면 목록에 나타나지조차 않는다. 아무리 전자 도장이 초당 20번씩 찍을 수 있더라도, 또 각종 분류법에 따라 한꺼번에 찍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인공지능 스팸 필터를 활용한 자동 전자 도장의 효율성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이러한 시스템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각국의 대통령들은 예전처럼 같이 모여서 밥도 먹고, 골프도 치고, 사진도 찍으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자동 도장 필터에 걸러지지 않는 비일상적인 사안들, 이를 테면, 옆 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는 대통령이 직접 도장을 찍고 있다… 음… 아마도…

그날 저녁의 통계적 사형 집행 명령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