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권의 철학

[YES24]스무 권의 철학

제대로 된 학문이라면 무릇 번역, 요약, 전달 등등이 가능해야 합니다. 번역될 수 없다면 시문학이요, 요약될 수 없다면 종교 경전이요, 전달될 수 없다면 계룡산에서 도닦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르리이까. 헌데, 철학이라는 학문에는 그런 풍토가 없지 않아 있는 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철학사상 중요한 원전들 중에는 정말로 시문학 작품처럼 쓰여진 책이 있기도 하고, 종교 경전처럼 쓰여진 책이 있기도 하고, 심지어 무슨 계룡산 비급처럼 쓰여진 책이 있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_-;;;

그렇지만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야, 세부전공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책들을 그렇게 있는 그대로 읽어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세부전공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작품/경전/비급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데에 목적을 두어야지, 중간에 함몰되어버려서는 곤란하겠구요. 하물며 그냥 관심이 있을 뿐인 비전공자에게는 번역/해석/요약된 재미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전공자들도 무슨 오타쿠처럼 쑥덕거리면서 신세한탄만 하지 말고, 그런 책을 제공해줘야 하겠구요.

그러니까 친구놈이 어느날 갑자기 “야 내가 갑자기 철학에 관심이 생겼는데, 어떻게 공부하면 좋겠냐?”라고 물을 때, “플라톤의 국가부터 읽어보도록 하여라. 가능하면 희랍어 원서로 읽으면 더 좋느니라.”라고 대답하면 저는 그냥 미친놈 취급 받고, 그 친구도 갓 피어난 관심을 꺼버리겠죠. 안 그렇슴까? “스무 권의 철학”은 이를테면, 친구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권할만한 “고전음악 20선”, “신세대 인기가요”, “흘러간 명곡집” 등등과 비슷한 컨셉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꼴랑 만원으로 무려 스무 권을! 권당 500원 꼴! 플라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껌값으로 해결! 철학사 2500년을 한 권으로 마스터! 핵심만 콕콕 찝어주는 쪽집게 철학 과외 선생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로 건너뛰어버리는 대담함! (중세 천년 다 족구하라 그래!) 키워드 중심의 짤막한 핵심 요약 단락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화장실에서 조금씩 읽기에도 안성맞춤! 반론과 변론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각 저자의 삶을 세 줄로 요약해주는 초간단 연보도 수록! 각 장마다 친절한 용어해설! (더 읽을 책들 목록은 안타깝게도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무용지물입니다. ㅈㅅ)

아무래도 한 사람의 저자가 골라서 북치고 장구친 책이라 편향적이지 않느냐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이 정도만 세련되게 편향되어 준다면, 편향되지 않은 잡다구리 만물상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러셀의 철학사 책에도 비슷한 비판이 가해지곤 하나 보던데, 저는 그 책에도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스무 권의 철학”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러셀의 “서양의 지혜“도 한번 읽어 보삼. 뭐든 재미가 있어야지, 재미도 없는 걸 억지로 쳐읽으면서 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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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괜히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화화 한다면 제목은 “요사리안, 군대에 가다”가 어떨까. 어릴 때 “어니스트, 학교에 가다” 이런 거 좋아했었는데. 대충 그런 삘로. 읽기가 약간 힘들어서 번역탓인가 했는데, 원래 문체부터도 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느낌인 듯하다. 아무렴 어때. 맛만 있으면 그만이지. 울다가 웃다가 엉덩이에 X나게 해주는 책임. ㅇㅇ

그냥 인상깊었던 한 단락만 퍼다 놓기로 함.

요사리안은 역시 추워서, 걷잡을 수 없이 떨었다. 스노든이 더러운 바닥에 온통 쏟아놓은 흉측한 비밀을 허탈하게 내려다보면서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의 창자가 전하는 뜻을 이해하기는 간단했다. 인간이란 물질이다. 이것이 스노든의 비밀이었다. 창문에서 던지면 그는 떨어지리라, 불을 붙이면 그는 타버리리라, 그를 묻어버리면 그는 다른 쓰레기나 마찬가지로 썩으리라. 영혼이 사라지면 인간은 쓰레기이다. 그것이 스노든의 비밀이었다. 모두가 곪았다.

“난 추워요.” 스노든이 말했다. “난 추워요.”

“어이, 어이.” 요사리안이 말했다. “어이, 어이.” 그는 스노든의 낙하산 줄을 당겨서 하얀 나일론 천으로 그의 몸을 덮었다.

“난 추워요.”

“어이, 어이.”

무신론자가 아니라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이, 어이.”가 아닌, 원래 멋지고 경건하고 심오한 뜻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기능적으로는 “어이, 어이.”와 완전히 똑같은, 보다 형식화된 표준 문구를 되뇌일 수 있다는 뜻이겠지.

간혹, 저렇게 말문이 막힐만한 상황에서는, 누가 버튼이라도 꾹 누른 듯 튀어나오는 그 주절거림이 부러울 때가 있기도 하다.. 종교들이, 장례식처럼, 살면서 몇 번 안 치르는 상황들에 유난히 특화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난처함을 해소해주는 좋은 틈막이로서의 종교 가설’이라고 해두자. ㅋㅋ

그건 그렇고 오르라는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식스핏언더에 아서 역으로 나왔던 배우가 자꾸만 연상됐는데, 지금 찾아보니 66년생. 꽥. 완전 동안이삼.

욕망의 진화

솔직히 태반이 싸이월드에 가서 추천글 몇 개만 읽어보면 널리고 널린, 누구나 다 아는 지식임. 그런 지식을 실용화한 사례도 있었는데, 그거이 바로 그 유명한 “화성 남자 금성 여자”
이 책은 그 뻔한 걸 체계화 학문화했다고 보면 될라나. 대단함.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대단함. 그냥 다 그런 거지 하고들 당연하게 넘어가던 것을, 그나마 막연히 화성 운운 금성 운운하던 것을, 다위니즘의 렌즈를 통해서 다시 보면, 이만큼이나 또렷해진다. 무엇보다도, 실제 근거로 써먹을 수 있는 재료로서 가공된다. 법 만들고 정책 결정하는데 싸이월드에서 퍼올 순 없잖아? 단, 커튼남 같은 오독/편향확증쟁이들에게는 절대로 읽혀서는 안 될 책. 이 책을 경전 삼아 남성 해방 운동을 펼쳐나갈 지도.

계속 읽기

만들어진 신

책 내용하고는 별 관계 없는 얘기.

겨우 진중권 보고 잘난 척한다는둥, 무례하다는둥, 대중 무시/혐오한다는둥 하는 애들한테 읽히고 나서 반응을 살펴보고 싶은 책. 무릇 음악에는 선율이 있고, 리듬도 있고, 화음 등등이 있어요. 사람 말에는 목소리가 있고, 감정이 있고, 내용이 있어요. 그 내용 중에는 또 사실 전달이나 의견/주장 같은 게 있는데, 그것에 동원되는 재료를 개념이라고 부르고, 뒷받침하는 구조를 논리라고 불러요. 그런데 분명하게 표현된 감정 뿐만 아니라, 딱히 표현하지도 않았는데 지맘대로 억측해낸 감정까지 혼자서 막 변태같이 느껴대고, 정작 내용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 일종의 음치 같은 것이 아닐까 함. 그러고 보면 또 이런 사람들이 지 얘기할 땐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요…

전에 이 책을 두고 안 봐도 내용이 훤하지만 트랜스포머 보는 기분으로 보겠다 그런 적이 있는데. 역시 도사마. 트랜스포머 KIN.
전해듣는 온갖 사례와 인용들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둘만한 책임.

참 437쪽에, “‘게이(gay)’가 ‘신이 아직 돕느냐(Got Aids yet)?’의 약어가 아니라면 쓰지 말라”라는 인용을 보고 이게 뭔 소릴까 했는데, 문득 정신집중 캠프가 떠올랐음. 아마 ‘에이즈 아직 안 걸렸냐?’라고 하는 게 맞겠지.

진화 오라토리오

교회가 예술의 주된 후원자가 된 것은 엄청난 부 덕분이었다. 역사가 다르게 전개되어 미켈란젤로가 거대한 과학관의 천장 벽화를 그리는 일을 의뢰받았다면, 그는 적어도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만큼 감동을 주는 무언가를 그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베토벤의 <중생대 교향악>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 <팽창 우주>를 들을 수 없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리고 하이든의 <진화 오라토리오>를 못 듣는다는 것도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리차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137-138쪽.

나도 유감스럽긴 한데, 도킨스의 가정에는 회의적임. 중생대나 팽창 우주, 진화 등을 예술 작품에 우려낼 정도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지적인 노력이 필요할 텐데, 그런 건 위대한 예술가의 인생을 낭비하는 측면이 좀 있음. 종교의 한 가지 미덕은, 굳이 시간 들여 머리를 쓰지 않고도 헌신적이고 숭고한 동기를 품게 해준다는 것.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기니까, 아무래도 이 쪽이 실용적;;; 감상자 쪽도 마찬가지.

읽다가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