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만능론

결혼 직후 나는 마인 강변 프랑크푸르트 외곽에 있는 독일령 비스바덴으로 전보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압수당해 산더미같이 쌓인 독일군 전문서류–미국 산업계가 사용함직한 발명품이나 제조법을 탐지한 서류들을 가려내는 민간인 기술진을 책임지게 되었다. 내가 수학도 화학도 물리학도 모른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내가 루스벨트 농림성에 취직했을 때 일찍이 농장 근처에 가본 일도 없었고 하다 못해 창틀 위에 아프리칸 바이올렛의 꽃분 하나 키워 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인문학자가 감독하지 못할 일이란–적어도 당시엔 그렇게 널리 믿어지고 있었다–아무것도 없었다.

커트 보네거트. 제일버드. 웅진. 65-67쪽.

인문학은 원래 만능이라능. 인문학의 과학 제어 능력은 그저 당연히 따라붙는 덤에 불과하다능.

X파일

《X-파일》에 대한 숭배는 프로그램의 이야기가 결국 ‘진짜 얘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해악이 옹호되어 왔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변호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방영되는 이야기들–연속극, 수사물 등–이 계속해서 세계를 단편적으로 그려낼 경우 비판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X파일 시리즈 내용 간략한 소개…) 하지만 그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가령 매주 두 명의 경찰관이 범죄를 해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자. 두 명의 수사관 중 하나는 항상 흑인 용의자를 지목하고 다른 하나는 백인을 의심한다. 그런데 매주 범인은 흑인임이 밝혀진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결국 허구에 불과하지 않은가? 충격적이지만 유비 관계는 충분히 정당하다.
리차드 도킨스, 무지개를 풀며.

나름 X파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도킨스의 플라톤적 모함에 쫌 분노하게 됩니다. 히히. 사실 다 뻥인데 뭐 어때요! 뻥인 걸 아는 동안엔 모든 게 오락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도킨스가 뒤에 예시랍시고 든 충격적인 흑인=범죄자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조만간 미국 등지에서 실제로 제작된다고 해도 저는 놀라지 않을 겁니다. ㅋㅋㅋ 꽤 재미있는 풍자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저는 정말로 생각해요.

만약 X파일이 정말로 대중에게 과학과 초자연에 대한 그릇된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건 뻔한 뻥도 못알아보게 할 정도로 부실한 공교육 탓이지, X파일 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X파일 제작자들이 욕을 먹으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 때에도 작품이 사회에 대한 해악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고, 뻥이 뻥인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주절주절 늘어놓는 찌질함이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진실로 향하는 길

… 잘못된 사실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에 큰 해악을 끼친다. 그러나 잘못된 견해도 어느 정도의 증거를 바탕으로 지지된다면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은 건전한 즐거움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잘못으로 향하는 경로 하나가 폐쇄되는 동시에 진실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기불이님께서는 과학책에 유통기한을 두자고 하십니다만, 흥! 1809년에 태어난 사람이 쓴 이 과학책, “인간의 유래”를 읽는 기쁨은 매우 컸습니다. 이 책에 유통기한을 둔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옛날옛적 유클리드의 과학책? “기하학 원론”이 직관과 연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희열을 준다면, 이 책은 경험과 귀납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순수한 기쁨을 준다고나 할까요. 신중함과 자신감을 모두 갖춘 성실한 지성만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입니다. 중간에 사슴이 어쩌고 풍뎅이가 어쩌고 줄줄이 나열할 땐 좀 졸렸지만 -_-; 그래도 지루한 부분을 견디고 나니까 막판에 다시 감동의 폭풍이 휘몰아칩디다.

“이거 왼쪽을 보니까 1234가 있고 오른쪽을 보니까 6789가 있음. 이건 아마도 5인 듯 ㅇㅇ.”

“1, 2, 3, 4, 5, 6, 7, 8, 9 다음에는 아마도 10이 올 것 같음. ㅇㅇ”

기본적으로 미취학 아동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렇게 간단한 논리만 가지고 생명의 비밀을 풀어내다니, 짱 아닙니까? 열심히 지구 전역에서 동식물 표본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하던 시대에 드디어 다윈이 생명의 주기율표를 발견한 겁니다. 사실 시대가 그런 시대였던지라 월리스의 공동발견도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다윈이 아니었더라도 생물 진화의 이론은 마침내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윈만큼 잘, 성실하게, 탁월하게, 간단하게™ 정리해서 내놓으려면 백년은 걸렸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