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의 보존

0. 역사 선생은 올해 첫수업부터 지론인 사료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요즘은 니들 그냥 손가락 하나만 요래요래 까딱까딱-하면 원본에 아무런 손상 없이 웬만한 자료는 눈깜짝할 새에 복제가 가능한 시대야. 그쟈? 근데 이게 원래는 안 그랬어요.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소리와 영상을 복제하기는커녕 저장하는 기술조차 없었거든. 그나마 글과 그림 정도만 원시적인 방법으로 보존이 가능했어. 더군다나 그림은 잉크 발라 찍어내는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도 손수 베껴그리는 것 정도밖에 방법이 없어서 몇 단계만 복제해도 원화를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지. 가장 정확한 편이었던 글조차 번역이나 표준 문법 어휘의 급격한 변화 등으로 인해 몇 세대만 거쳐도 오류 투성이 누더기가 되어버렸으니 말 다 했지 뭐. 중세에는 그나마 라틴어라는 기록 전문 언어를 사용하고, 관리가 잘 되는 교회의 수도사들만 이런 지식 전달 사업에 참여한 덕분에 이런 오류는 덜한 편이었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렇듯이 오류의 급격한 증가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어.”

고리타분한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언제나처럼 몇몇 아이들이 쓰러져 자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런 오류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대량으로 복제하는 거였걸랑. 이게 뭐냐믄 일단 막 복제하는 거야. 베끼고 또 베끼고, 막 베끼는 거야. 베낀 거 또 베끼고, 베낀 거 또 베끼고. 그렇게 베껴서 이 수도원 저 수도원에 복제본을 마구 일단 퍼뜨려놓고 나면, 나중에 서로서로 비교해보고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수결의 원칙만 따라도 어느 정도 원본을 파악할 수 있게 되거든. 정리만 잘 하면 대체 누가 언제 몇번째 사본을 보고 베낀 건지 대충 추적도 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고. 대표적인 텍스트가 바로 성경인데. 각각 조금씩 오류를 가졌지만 무수히 많은 사본들이 존재하는 덕분에, 다른 서적에 비해 어느 정도 원본에 가깝게 복원해내기가 쉬웠던 거야.”

하기야, 지금이야 당시 대형 수도원 장서보다 더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개목걸이에 달고 다니는 시대다. 중세까지 인류가 축적해왔던 모든 지식보다 더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개개인이 매일매일 생성해내는 시대다. 애들한테 이런 얘기가 와닿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대량 복제는 말이 쉽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야. 요즘에야 거저 줘도 안 쓰지만, 그 옛날엔 우선 종이도 펜도 잉크값까지 매우 비쌌거든. 종이도 만들 줄 몰라서 양가죽 같은 데다 썼지. 그런데 이 중 무엇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싸구려를 쓰면 보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하루이틀 볼 거면 상관 없는데, 당시로선 십년 백년 천년을 생각해야 했으니까. 그 뿐만이 아니야. 내용을 이해하여 가능한 정확하게 필사할 수 있는 전문인력 양성에 드는 비용도 컸어. 요즘으로 치면 우주비행사 하나 키우는 거랑 맞먹는다고 보면 돼. 왜 체력도 좋아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 하고 운도 좋아야 하잖아. 딱 그거야. 당시로선 최첨단의 인재들이었지. 그런데 이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끼면 복제의 정확성이 현저하게 낮아질 수밖에 없었어. 디지탈 시대의 기술 복제는 단순히 복제를 기술적으로 쉽게 만들어 정확성을 증가시킨 것만이 아니라, 이 모든 비용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떨어트려 바야흐로 대량 복제를 가능케 해준거야.”

역사 선생의 고리타분한 강의는 교실의 학생들이 또 전멸한 오늘도 꿋꿋하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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