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저는 아주 진짜입니다.

원문 링크 : Letters of Note: I am very real

1973년 10월, 브루스 세버리Bruce Severy라는 노스다코타주 드레이크 고등학교의 26세 영어교사는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도살장을, 수업시간에 교육 보조자료로 쓰기로 결정했다. 다음 달인 11월 7일, 교육 위원회 위원장인 찰스 맥카시Charles McCarthy는 “외설적 언어”를 이유로 서른두 권 전부를 학교 화로에 태우라고 지시했다. 다른 책들도 곧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11월 16일, 커트 보네거트는 맥카시에게 다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1973년 11월 16일
맥카시씨 귀하

저는 드레이크 학교 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의 당신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요즘 유명해진 당신 학교 화로에서 저서가 파괴된 미국 작가 중 하나입니다.

당신 지역사회 일원 중 일부가 제 작품을 두고 사악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저로서는 엄청나게 모욕적인 일입니다. 드레이크로부터의 그 소식으로 미루어 볼 때 거기 분들께서는 책이나 작가를 아주 가짜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얼마나 진짜인지 알려드리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또한 여러분들이, 저의 출판사와 제가 드레이크로부터의 그 기분나쁜 소식을 아무데도 써먹지 않았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그 소식 덕분에 팔리게 될 책에 대하여 서로 축하하고 있지 않습니다. TV 출연을 사양했고, 사설란에 격노의 기고를 하지도 않았으며, 장황한 인터뷰에 응하지도 않았습니다. 저희는 화나고 역겹고 슬플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사본을 다른 누구에게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쥐고 있는 이것이 유일한 원본입니다. 드레이크의 여러분들께서 제 명성에, 그리고 자기 자식들의 눈과, 나아가 세상의 눈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기에, 이 편지는 제가 드레이크 분들에게 드리는 아주 사적인 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사람들에게 보일 용기와 체면이 있으실런지요, 아니면 이 편지 또한, 여러분들의 화로 불에 던져질런지요?

신문에서 읽고 TV에서 본 걸로 미루어, 당신은 나와 다른 작가들이 무슨 젊은이들의 정신에 독을 타는 것으로 돈 버는 것을 즐기는 독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건장한 51세의 사람으로서, 어릴 때 농장 일도 많이 한 바 있으며 연장들도 잘 다룹니다. 여섯 아이를 길렀는데, 셋은 제 자식이고 셋은 입양했습니다. 모두 잘 자랐으며 그 중 둘은 농부입니다. 2차 세계대전 전투보병 참전용사이며, 부상으로 훈장도 받았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모두 열심히 일해서 번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체포되거나 고발당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에게 매우 신뢰 받는 사람이며, 아이오와 대학교, 하버드, 뉴욕 시립대에서 가르친 젊은이들로부터도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대학과 고등학교 졸업식 연사 초청을 매년 한 다스씩 받습니다. 제 책들은 아마 생존하는 다른 어떤 미국 소설가의 책보다도 여러 학교에서 널리 쓰이고 있을 것입니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하겠듯이, 여러분들께서도 혹시 제 책들을 읽어보셨더라면, 제 책들이 성적이지도 않으며, 어떠한 난폭한 것도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저의 책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소보다 더 친절하고, 더 책임감 있기를 요구합니다. 등장인물 중 일부가 거칠게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거칠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군인들과 근면한 남자들이 거칠게 말하는데, 이는 가장 보호받으며 자라는 아이들도 아는 바입니다. 또한 그러한 말들이 아이들에게 그리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우리도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다치게 한 것은 사악한 행동과 거짓말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으니, 결국 당신은 여전히 이렇게 대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지역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힐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하지만, 무지하고 가혹하며 비미국적인 방식으로 그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하신다면, 사람들이 당신들을 나쁜 시민이자 멍청이라고 부를 자격이 생긴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당신들의 자식들 또한 당신들을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바로는, 여러분들이 한 일에 대한 전국에 걸친 격렬한 반응 때문에 여러분들의 공동체가 어리둥절해 있다고 합니다. 드레이크가 미국 문명사회의 일부이며, 그렇게 비문명적으로 행동하신 것에 대해 동료 미국인들이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신 셈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께서는, 책이란 아주 타당한 이유에서 인류를 자유롭게 해주는 신성한 것이며, 책을 혐오하고 불태운 나라들에 맞서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실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미국인이라면, 여러분의 공동체 안에 자신의 것만이 아닌 모든 사상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위원회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 사실은 지혜와 성숙함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신다면, 읽지도 않은 책들을 비난하고 불태운 것이 자유 사회의 젊은이들에 대한 아주 형편없는 교육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식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생존하는 데에 더 잘 대비할 수 있으려면, 모든 종류의 견해와 정보에 노출시키도록 결심하셔야 합니다.

한번 더: 당신은 저를 모욕하였고, 저는 훌륭한 시민이며, 저는 아주 진짜입니다.

커트 보네거트

[펌]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한다

원문: http://www.theonion.com/content/opinion/people_like_food

오늘날 사람들이 뭔가에 의견을 함께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항상 잘 차려입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만화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람들이 나오는 것만을 보고 싶어한다. 중간 지대는 어디에 있는가? 없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음식이다.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한다.

자 내 주장에 반대하기 전에, 잠깐만 생각을 해보시라. 나랑 얘기해봤던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하더라. 우리 엄마도 음식을 좋아한다. 내 동생도 음식을 좋아한다. 우리 양아버지는 우리 엄마보다도 음식을 더 좋아한다. 모르긴 몰라도 대통령도 음식을 좋아할 것이다. 그와 식사를 함께 했던 적은 결코 없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밥상 앞에서 커다란 사발에 마카로니 앤 치즈를 먹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노숙자들은 음식을 사기 위해 허구헌날 내게 돈을 구걸하더라. 내가 보기에 음식이란 상당히 인기가 있는 듯하다.

또, 잘 생각해 보면, 음식이란 것에는 좋아할 만한 점이 참 많기도 하다. 맛도 있고, 먹기도 좋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이뿐이지만, 그 두 가지만으로도 나는 음식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방금 막 또 하나가 생각났다. 음식은 아마도 우리가 입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건강에도 가장 좋은 것일 듯하다. 못 믿겠으면 아무 의사한테나 물어봐도 좋다.
그리하여, 과연,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 람들이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서 큰 게 하나 있는데, 내가 지금 그것을 논박해보겠다. “편식하는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은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이 의견의 일부는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편식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당장 주어진 음식들을 전부 다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식 하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모든 음식을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아 직도 내 말을 못 믿겠는가? 모든 반대자들을 조용하게 만들 예시를 들어보겠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도중에, 내 친구 데일은 아스파라거스를 먹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혹시 얘는 음식을 싫어하는 건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가 닭구이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그는 닭을 좋아하는데, 닭은 음식이므로, 따라서 그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거 봐라. 편식하는 사람들도 음식을 좋아한다.

이건 사람들이 음식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보여주는 많은 예들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밖 에 나가보면 모두를 위한 음식들이 있다. 햄버거가 좋은 예다. 하지만 햄버거를 싫어한다고 해도, 고려해야 할 다른 음식들이 많이 존재한다: 스파게티, 치킨 너겟, 치즈버거, 씨리얼, 베이컨, 팬케익, 팟파이, 유제품 등. 어떤 사람들은 스타버스트 사탕이나 치즈크래커처럼 조리할 필요도 없는 음식을 좋아한다. 또한 찬 음식이나, 유동식, 부드러운 음식, 딱딱한 음식, 젤리를 채운 음식 같은 것들도 있다. 충분히 열심히 살펴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 하나쯤은 찾게 될 거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본다.

당신도 피자는 좋아하겠지.

사 람들은 음식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음식을 먹는 사이사이에 또 시간을 내어 음식을 먹기도 한다. 그래서 간식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아무 때나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맛도 좋은 간단한 음식 말이다. 수퍼마켓의 간식 코너는 아주 크고, 선택의 폭도 넓다.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해서 돈 주고 살 것이라는 사실을 수퍼마켓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으며, 당신도 잘 들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 내가 통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한 98%쯤은 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매일 먹을 것 같다. 모든 학생들이나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점심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비율은 정말 높을 수밖에 것이다. 그들이 그 시간에 달리 무얼 하겠는가? 아기들조차도 음식을 못 얻어먹으면 울어댄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우리가 실질적으로 음식을 먹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는 증거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그토록 좋아하는 걸 수도 있겠다.

음식은 주변에 늘 있어왔다는 것: 이것은 하나의 팩트다.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에서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에도 음식은 거기에 있었다. 첫 추수감사절 때에도 음식은 거기에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인류가 언제나 해온 바로 그것이다. 음식이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음식이 없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인류라고 부를 수나 있었을까? 우리는 아마도 꽤나 허기가 져 있거나, 아니면 죽어있을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제 마음을 열고 사람들이 음식을 좋아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사람들은 원래 그렇다. 진짜다. 감사.

[펌] 우리는 왜 패닉하나?

출처:
http://www.sciam.com/article.cfm?id=why-do-we-panic

우리는 왜 패닉하나?

스트레스에서 두려움을 거쳐 본격적인 공황 장애에 이르는 경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가 당사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소식을 제공한다

할 아르코위츠와 스캇 O. 리리엔펠드 씀.

By Hal Arkowitz and Scott O. Lilienfeld

“퇴근하고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 중이었어요,” 데이빗이 보고했다. “당시 스트레스가 아주 심했죠. 긴장은 했지만 집에 가서 쉬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빠방! 제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았어요. 땀을 흘리고 덜덜 떨었죠. 생각들이 마구 오갔고, 내가 미치거나 심장마비가 오는 건가 걱정이 되었어요. 차를 길가로 빼고 응급실로 데려가 달라고 아내에게 전화했어요.”

데이빗의 공포는 이유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급실 의사는 데이빗(필자 중 한 명인 Arkowitz가 맡았던 치료 환자들 몇몇의 짬뽕)에게, 그가 공황 발작을 겪었던 거라고 말해주었다.
진 단 및 통계 매뉴얼Diagnostic and Statistica Manual(DSM)의 최근 판에서는 공황 발작을, 심장의 두근거림이나, 숨이 가빠짐, 땀 흘림, 떨림, 그리고 미치거나 분별력을 잃거나 죽는 것에 대한 걱정을 수반하는, 강렬한 공포나 격렬한 불안의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인 경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발작은 분명한 자극도 없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더더욱 두려움에 질리게 만든다. 인구 중 약 8에서 10퍼센트가 이따금씩 발작을 경험하지만, 5퍼센트만이 공황장애로 발전한다.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들 대부분이 때때로 경험하는 것처럼 단순히 걱정들이 쏟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공황 발작을 겪었던 환자들은 전형적으로 그것을 자신이 겪어본 중에 가장 무서웠던 사건으로 묘사한다.

연구를 통해 중요한 진전들이 이루어졌는데, 무엇이 첫 공황 발작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해명은 애초에 발작을 피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스트레스가 치명적 수준까지 차오르면, 아주 작은 양의 스트레스가 더해지는 것으로 발작을 유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발작을 일으킨 사람은 그 사건이 느닷없이 찾아온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패닉 쪽으로 기울어진 유전적 경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심리학자 Regina A. Shih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그녀의 동료들과 함께 한 리뷰 글에서 썼다. 그 장애는 가계를 따라 내려오며, 일란성 쌍동이 중 한 쪽이 공황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쪽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유전적으로 덜 비슷한 이란성 쌍동이보다, 두배에서 세배 높아진다. 이러한 발견이 환경 요인을 배제시키진 못하겠지만, 유전적 요소를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공황 장애는 환자들의 삶의 질에 심각한 제한을 가져온다. 환자들은 또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한 지속적인 우려로 고통받기도 하고, 관련된 상황을 피하려 하기도 한다. 공황 장애의 진단을 받으려면, 환자는 난처한 상황(말하자면 교실 같은 공공장소)이나, 도움을 얻기 어려운 상황(예를 들어, 주변에 의료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킬까봐도 걱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광범위한 회피를 수반하는 공황 장애에는, 광장공포증이 딸린 공황 장애로 진단이 내려진다. 극단적인 경우 환자들은 꼼짝없이 집에만 묶여있게 될 수도 있다.

정상적인 두려움에서 심각한 공포로

그토록 무력하게 만드는 발작의 근원은 무엇일까? 공황장애 및 관련 장애들을 이해하고 치료하기 위한 선구적 연구를 해온 보스턴 대학교의 심리학자 데이빗 H. 발로우David H. Barlow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투쟁 도주 fight or flight” 반응이 심박수를 높이고, 실재하는 위험이 없을 때의 “오경보false alarms”(이와 반대로 실재하는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똑같은 반응은 “경보true alarm”라고 한다.)가 숨을 가쁘게 할 때 공황발작을 야기된다고 본다.
우리가 경보나 오경보를 경험할 때, 우리는 그로 인해 당시 나타났던 생물학적 반응과 심리학적 반응을 연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합은 “학습된 경보learned alarms”이 되어 나중에 공황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
외 부 환경과 내부의 신체적 계기(늘어난 호흡수 같은 것)가 둘 다 학습된 경보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하면 공황 발작을 경험하는데, 이는 그러한 생리학적 자극이 공황 발작 때와 유사한 신체 감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단발성 발작만을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본격적인 공황 장애로 진행되는가? 발로우는 그와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종합하여 불안 장애의 통합 이론을 개발했다. 그 이론은 공황 장애로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소인들을 제시하고 있다.

  • 일상 생활의 사건들에도 과잉 반응을 하게 만드는 불안을 일으키는, 일반화된 생물학적 취약성.
  • (부모의 과잉 보호 같은) 어린 시절의 학습으로 인해, 세상이란 위험한 곳이고, 스트레스는 압도적인 것이라 통제될 수 없다는 불안을 일으키는, 일반화된 심리학적 취약성.
  • 어린 시절에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 위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고 학습하게 되는, 특수한 심리학적 취약성.

이 러한 취약성들을 가진 사람이 장기적인 스트레스와 공황 발작을 경험할 때 공황 장애로 진전된다. 첫번째 발작은 심리학적 취약성들을 활성화시키고, 외부와 내부의 계기에 대한 과민증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약한 자극제를 함유한 약만으로도 발작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좋은 소식은 있다. 특히 두 가지 발견이 공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안심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모든 공황 발작이 알려진 사건을 통해 유발된다.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것을 앎으로써 예측할 수 없다는 느낌에서 오는 걱정을 덜 수 있다. 둘째, 공황 발작이란 위험의 부재 상황에서 투쟁-도주 반응이 오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움으로써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기초 연구는 우리가 공황 장애를 이해하는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치료법도 마련해주었다. 특히, 발로우와 그의 동료들은, 당신의 불안과 공황의 극복Mastery of Your Anxiety and Panic이 라는 저서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공황 통제 치료에 대해 썼다. 그 치료는 공황 장애에 대한 교육과 공황 발작을 일으키는 내부 및 외부의 단서들로의 다소 점진적인 노출을 통해, 신체 단서들의 파국적 해석을 변화시킴으로써 더 이상 발작을 유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치료법은 대부분의 사례에서 장기적으로 해당 장애에 대한 약물 요법을 능가했다.

초파리의 기억

내용은 흥미로웠다. 초파리 얘기만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는데, ebs 교양 프로 한 편 본 느낌. 중간중간 삽화나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

지난번, 핀치의 부리 에서, 인용들이 어째 나중에 끼워넣은 것처럼 따로노는 듯 싶다 그랬는데, 이 책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글을 쓰다가 관련있는 듯한 내용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그걸 또 그때그때 전부 써버리는 것이 조너선 와이너라는 작가의 스타일인 듯. 읽는 사람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나는 별로였지만.

읽다가 마음에 걸린 부분들을 (오탈자는 빼고) 대충 기록해봤음. 대부분이 번역서의 문제였고, 독서를 방해할 정도로 심하다 싶은 문제들도 종종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상당 부분이 번역자 자신보다도 출판사측의 부실한 검토 문제인 듯. 책에 써있는 출판사 홈페이지(www.eclio.co.kr)에 글을 남길까 했는데, 마땅히 남길 곳도 없기에 걍 이 밑에 달아둔다. (사실 이 책을 출판했었다는 사실을 찾을 수도 없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쪽. 감수자 최재천의 추천사.

내가 김동인의 소설 내용을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사람 발가락이 다 거기서 거기 대충 똑같이 생긴 건데, 그런 발가락을 보고 자기랑 닮았다며 위안을 얻는, 오쟁이진 남자 얘기 아니었나. 흠. 누가 자기랑 미남/미녀 배우가 닮았다고 그러면 “그래.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이 닮았다.”며 놀리듯이.
그나저나 최재천 교수의 글은, 읽을 때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 느낌의 원천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는 연단 위의 교장선생님을 연상케 한다.

갓 태어난 거위 새끼는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자를 보고 왼쪽으로 움직이면 어미 거위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매로 인식한다.어미 거위의 그림자를 보고는 겁을 먹지 않지만 매의 그림자가 싶으면 재빨리 달아난다.
27-28쪽.

목이 길고 꼬리쪽이 짧은 어미 거위, 목은 짧고 상대적으로 꼬리쪽이 긴 매, 따라서 대충 뭐 이렇게 –x- (x는 날개) 생긴 그림자 그림 한 장이라도 넣어줬어야지. 그냥 왼쪽 오른쪽이라고 말로만 설명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임? 나야 딴데서 이 얘기를 그림과 함께 본 적이 있어서 무슨 얘긴지 대충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뭥미 했을 듯. 작가에게, 그림 안넣고 글로만 묘사하는 데에 무슨 강박이 있나 싶음.

기원후 2세기 그리스의 의학자 갈렌(…)
33쪽.

별거 아닌데, 갈렌->갈레노스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그 비밀을 품고 있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셰익스피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1612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 『폭풍우 The Tempest』에서 프로스페로(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작가 자신과 가까운 인물. 모든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의 원형)는 자신의 양자 칼리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악마놈, 그놈은 악마야. 타고난 악마.
아무리 가르쳐도 그놈의 천성은 고칠 수 없단 말야.

34-35쪽.

이건 명백히 번역자의 잘못. 바로 앞에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의 셰익스피어 얘기를 하고 나서 등장하는 인용문인데, 정작 인용된 내용 속에는 본성이나 양육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돼? 앙? 내가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구글로 막 스펠링도 어려운 셰익스피어를 영어로 쳐넣는 고생 끝에 직접 원문을 찾아봤어. “A devil, a born devil, on whose nature Nurture can never stick”이라고 나오네. “악마, 타고난 악마, 그 본성에, 양육이 도통 안 먹히는 놈” 뭐 이런 얘기인 것 같아. 물론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은 이렇게 어거지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전문 문학번역자의 번역을 찾아옮기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단어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인용의 경우엔 최소한 원문을 같이 실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거 아닐까? 읽는 사람 벙찌잖아. 그렇다고 어떤 번역본을 인용했는지 밝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블 벙찜…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
71쪽.

역주에 약간 의문. 선불교 승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라고 하기보다는. 음.

길게 꼬인 분자 사슬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 천문학자들 눈에 비친 행성의 모습이나 20세기 초반 물리학자들이 바라보던 원자의 모습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댈 수도 없는 작은 점일 뿐이었다.
73쪽.

현미경으로 행성 보신 적 있으세요? 본 적 없으면 말도 하지 마세요.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다윈은 런던동물원에서의 실험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나는 런던동물원의 아프리카산 큰 독사 앞에 있는 두꺼운 유리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뱀이 갑자기 달려들어도 절대 놀라서 뒤로 물러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내 결심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뒤로 펄쩍 물러났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이성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험을 상상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14~115쪽.

이건 문제점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했던 비슷한 짓이 떠올라서 재미있길래 기록해둠.
https://intherye.wordpress.com/2006/03/31/injection/
다윈이랑 같은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ㅋㅋㅋ

어느 날 교수회의에서 윌슨이 생태학자를 한 명 더 채용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윌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신이 나갔답니까?”/”무슨 뜻입니까?”/”생태학자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18쪽.

둘 중 하나(아마도 후자)는 왓슨일텐데. 번역하면서 둘 다 윌슨으로 써버리는 실수를 한 듯. 혼자 정신 나간 듯이 자문자답하는 꼴이 됐다.

그는 한 식물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꽃의 속명을 지었다는 사실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더구나 그 꽃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 『내 인생의 추억 Memories of My Life』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 우생학에 대한 간단한 설명 몇 줄과 함께 ‘갈토니아 칸디칸스’의 그림을 조그맣게 삽입했다.
131쪽.

여기서 “그”는 골턴. 역자는 인명과 학명을 한글로 옮길 때 골턴Galton과 갈토니아Galtonia와의 연관성을 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암수가 한 몸인 이 초파리는 그리스어 ‘여성gyne’과 ‘남성andr’을 따서 ‘자웅모자이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174쪽.

‘여성gyne’+남성andr’ = ‘자웅모자이크’ -_- 이 역시 원문 병기가 필요한 부분.

그 명판 위에는 수컷 초파리 다리에 있는 성즐(수컷 초파리의 앞다리에 있는 까만점-역주)의 현미경 사진을 붙였다. 수컷은 성즐을 이용해 암컷에 달라붙는다.
211쪽.

역주가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 까만점 가지고는 암컷은커녕 어디에도 달라붙을 수 없으니. 성즐이라는 것이 그저 까맣기만 한 점 같은 것이 아닐 거라는 걸, 나 같은 문외한도 내용만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어딘가에서 베껴오는 역주라는 삘링…

213쪽 이후에 계속 나오는 ‘피리어드’ 유전자는 158쪽에서 ‘주기period’라고 불렀던 유전자와 같은 것인 듯. 겨우 몇십 페이지 떨어져 있다고 용어통일에 실패하면 찜찜하지.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복제생물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217쪽.

복제생물이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 말이 안 되잖아. 역시 원문 병기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인데 번역자가 홀랑 빼먹었다.

“나는 스물세 번째 호메오박스(초파리의 호메오틱 선택 유전자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염기배열-역주)는 연구하고 싶지 않다.”
309쪽.

또 하나의 있으나마나 한 역주. 龍(용 용). 뭐 이런 느낌.

잘 먹기

‘The Stupidity of Dignity’ by Steven Pinker – RichardDawkins.net

이런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최악의 것은, 다음과 같은 덜 문명화된 형태의 음식물 섭취이다. 아이스크림 콘을 핥아먹는 것(비격식적인 미국에서는 수용되게 되었으나, 여전히 공공장소에서 먹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마치 고양이 같은 행위) … 길거리에서 먹는 것(심지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즉 약속 시간 사이에 따로 먹을 짬이 안 난다던가)은 자기 통제력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배의 노예가 되었음을 뜻한다. … 잘라서 입으로 나르는 데에 도구를 쓰지 않음으로써, 무슨 짐승 마냥 이빨을 사용하여 씹을만한 분량을 찢어내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 이런 마치 개 같은 먹기는, 꼭 그렇게 먹어야만 한다면, 마땅히 공공의 시선으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들은 우리의 부끄러운 행동을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뭐병 여병추스러운 인용문인데 너무 재미있기에 혼자 보기 아까워서 겨털 번역.
이런 사람이 생명윤리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불러낸 사람이라니 미국 꼬라지도 참 안 됐다 싶다.
원문은 짧지만 명문.

국제 앰네스티 사형 QnA

사형

질문과 답변들

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사형에 반대하나요?

앰네스티 인터네셔널은 범죄의 속성, 범죄자의 성향, 아니면 수감자를 죽이기 위해 국가에 의해 사용되는 방법에 상관없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형에 반대합니다. 사형은 인권에 대한 궁극적인 부정입니다. 그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계획적이고 냉혈한 인간 살해입니다. 그것은 세계인권선언에서 주장된 생명권을 위반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잔인하고, 반인륜적이며 굴욕적인 형벌입니다.

고문이나 잔인하게 다루는 것에는 어떠한 정당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고문과 마찬가지로, 사형은 개인에 대한 극단적인 신체적 정신적 공격으로 구성됩니다. 인간을 살해하는 행위로 인해 유발되는 신체적 고통은 정량화될 수 없으며, 국가의 손에 의한 죽음을 미리 아는 것으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형은 차별적이며 때로는 가난한 자들, 소수자들, 그리고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공동체에 대하여 불균등하게 사용됩니다. 그것은 자의적으로 부과되고 집행됩니다.

매년 발생하는 수천 건의 살인으로부터 “최악 중의 최악”인 범죄들과 공격자들을 골라내려는 국가의 시도들은 불가피하게 비일관성과 오류로 이어지는데, 이는 차별, 검찰 실수, 부적절한 법 해석으로 인해 악화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결함들입니다. 인간 판사가 오류를 피할 수 없는 만큼, 무고한 자를 처형하게 될 위험 역시 절대로 제거되지 못합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무조건적인 전세계적 사형 폐지를 계속적으로 요구합니다.

사형을 끝낸다는 것은,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가치들과 일관되지 못하는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공공정책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취소될 수 없는 오류의 위험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공공의 손실이 큽니다. 사형이 특별한 억지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 보여진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갱생과 화해의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그것은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전략을 알려줄 수도 있었을 설명을 추구하기보다는, 단순한 반응을 촉진합니다. 그것은 살인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연장시키며, 그 고통을 비난받는 수감자의 친지들에게로 확장시킵니다. 폭력범죄에 맞서는 데나, 폭력 범죄에 영향받은 사람들을 돕는 데에 쓰일 수도 있을 자원과 에너지를 딴 데로 돌립니다. 그것은 폭력 문화의 증상이지, 해결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것은 폐지되어야 합니다.

사형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앰네스트 인터내셔널은 폭력 범죄 희생자와 그 친지들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닌지요?

사형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결코 사형을 선고받은 범죄들을 과소평과한다거나 용서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다수의 나라들이 현재 폭력범죄의 옹호자들이 되는 셈일 텐데, 이는 분명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욕보인 인권 희생자들과 깊이 관련된 하나의 기구로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업신여기고자 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커다란 동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형 고유의 최종성과 잔인성은 오늘날 문명화된 행동 규범과 양립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것은 폭력범죄에 대한 적절치 못하고 용납될 수 없는 반응입니다.

정부에 의한 사형은 반대 목소리를 금지하기 위한 것인가요?

사형은 정적들을 영원히 침묵하게 하거나,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개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어왔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형을 억압의 도구로서 그토록 유혹적이게 만드는 것은 그것의 돌이킬 수 없다는 속성입니다. 수천 명이 정부에 의해 사형 당하고는, 권력을 쥔 새 정부에 의해 무죄로 인식됩니다. 사형이 처벌의 적법한 형태로 수용되는 한, 정치적 오용의 가능성은 남을 것입니다. 폐지만이 그러한 사형의 정치적 남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습니다.

국제법은 사형의 사용에 대해 뭐라고 하나요?


(이차 세계대전 동안 목격된 국가의 잔혹성과 공포의 어이 없는 확산에 응답하여 1948년 UN 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진) 세계 인권 선언에서는 각 사람의 생명권(3조항)을 승인하고, “아무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모욕적인 취급이나 처벌을 받아서는 안된다.”(5조항)고 정언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형은 이러한 권리들을 침범합니다.

사형을 폐지하기 위한 국제적 지역적 조약들에 의해 또 다른 지지들로도 뒷받침됩니다.

  1. The Second Optional Protocol to the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aiming at the abolition of the death penalty, adopted by the UN General Assembly in 1989, provides for the total abolition of the death penalty but allows states parties to retain the death penalty in time of war if they make a reservation to that effect at the time of ratifying or acceding to the Protocol.

  2. Protocol No. 6 to the European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concerning the abolition of the death penalty, adopted by the Council of Europe in 1982, provides for the abolition of the death penalty in peacetime; states parties may retain the death penalty for crimes “in time of war or of imminent threat of war”.

  3. The Protocol to the Americ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to Abolish the Death Penalty, adopted by the General Assembly of the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in 1990, provides for the total abolition of the death penalty but allows states parties to retain the death penalty in wartime if they make a reservation to that effect at the time of ratifying or acceding to the Protocol.

  4. Protocol No. 13 to the European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adopted by the Council of Europe in 2002, provides for the abolition of the death penalty in all circumstances, including time of war or of imminent threat of war. Any state party to the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can become a party to the Protocol.

[사형에 관한 상기 조약들을 승인한 국가들의 최신 목록은 앰네스티 인터네셔널 웹사이트www.amnesty.org의 사형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국제 사법 재판소는 1998년에, 학살이나 전쟁법 위반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들처럼 극단적으로 중한 범죄들에 대한 사법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소가 부과할 수 있도록 용인된 처벌 형태로부터 사형을 제외시켰습니다.

비슷하게, 1993년과 1994년 전 유고슬라비아 국제 범죄 심판위원회와 르완다 국제 범죄 심판위원회를 만들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러한 범죄들에 대한 처벌로서 사형을 제외시켰습니다. the Special Court of Sierra Leone, the Special Panels in Dili, East Timor 그리고 the legislation establishing the Extraordinary Chambers for Cambodia에서도 그런 범죄들에 대하여 역시 사형은 제외되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국가는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때가 있지 않나요?

어떤 경우에는 국가 공무원에 의해 생명을 빼앗는 것이 자기 방어 논리로 정당화될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가 (국제전이든 내전이든) 전쟁중이라거나, 경찰 공무원이 자신이나 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해야만 할 때 등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조차 치명적인 무력의 사용은 남용을 막기 위해 국제적으로 수용되는 법적 보호책들로 둘러싸입니다. 이러한 무력 사용은 남에 의해 사용된 힘으로부터 야기되는 즉각적인 피해에 맞서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형은 즉각적인 생명 위협에 대한 자기 방어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덜 가혹한 수단들을 통해서도 다뤄질 수 있는 수감자에 대한 계획적인 살해입니다.

사형이 국가가 범죄와 싸우기 위해서 중요한 도구라는 논증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건가요?

너무도 많은 정부들이 급박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몇 명 또는 수백 명의 수감자들을 처형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형은 사회에 더한 안전이 아니라 더한 잔혹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많은 나라들의 너무도 많은 시민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과학적 연구들은 사형이 다른 처벌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범죄를 방지한다는 확증을 찾는 데에 지속적으로 실패했습니다. 1988년에 UN을 위해 수행되어 1996년과 2002년에 갱신된, 사형과 살인율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 조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조사는 처형이 종신형보다 큰 억제 효과를 가진다는 과학적 증거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한 증거는 앞으로도 나올 것 같지 않다. 전반적인 증거들이 억제 가설에 긍정적 지지를 보태주지 않고 있다.”

폐지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최근의 범죄 수치는 폐지가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보이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캐나다에서는, 인구 10만당 살인율이 살인에 대한 사형을 폐지하기 직전 해인 1975년 3.09라는 꼭지점에서 떨어져서, 1980년에는 2.41이 되었고 이후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폐지 후 27년째인 2003년에는, 인구 10만당 살인율은 1975년보다 44퍼센트 낮아진 1.73이며 지난 삼십년 중 최저치입니다. 2005년에는 이 수치가 다시 2.0으로 증가했지만, 이 수치는 사형제가 폐지되었을 때보다 여전히 3분의 1 이상 낮습니다.

살인 같은 중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이성적인 결과 계산 후에 그런다고 가정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살인은 종종 감정이 이성을 누를 때나 약물과 알콜의 영향 하에 이루어집니다. 폭력범죄를 저지르는 일부 사람들은 매우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병이 있습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1997년 이래로 사형을 언도 받은 미국의 수감자들 중 적어도 열 명 중 한 명 이상이 그들의 사형선고, 그 이유와 함축하는 바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중 어떤 경우도 사형에 대한 공포가 억제력을 가지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계획적인 연쇄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잡히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계속하기로 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억제의 열쇠는 발견과 체포 그리고 유죄 판결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사형이 고유의 억제 효과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형에 대한 공공정책의 기반으로서 억제가설에 의존하는 것이 무익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형은 가혹한 처벌이지만, 범죄에 대하여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재범을 막기 위해서 어떤 수감자들을 처형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나요?

수감자들이 다시 피해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서 사형은 잔인한 수단입니다. 그 본질상, 사형은 이미 수감되어 사회로부터 제거된 죄수에게만 집행될 수 있습니다. 그 수감자가 사회에 대한 폭력행위를 더 이상 저지를 수가 없기 때문에, 사형은 보호 방법으로서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감과 달리, 사형은 절대로 교정될 수 없는 사법 오류를 수반합니다. 무고한 수감자가 처형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형은 애초에 저지르지도 않았던 범죄를 반복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사형당한 자들이 선고받은 범죄를 다시 저질렀을 지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사형이란, 많은 경우 일어나지도 않았을 가설적인 미래의 범죄를 막기 위해 수감자들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범죄자의 교화 원칙을 부정합니다.

가두는 것만으로는 풀려났을 때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한 관점에서 가석방 절차를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사형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그에 대한 답이 확실히 아닙니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확실히 죽어 마땅하지 않나요?

살인을 책망하기 위해 사형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에 의한 그러한 행위는, 피해자에게 신체적 폭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범죄자의 바램의 거울상입니다. 부가적으로, 모든 범죄 사법 체계는 차별과 오류에 취약합니다. 어떠한 시스템도 공정하고 일관적이며 오류 없이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어야 하는지 결정할 능력이 없으며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편의적이고 임의적인 결정과 우세한 공중 의견이 최초 체포로부터 최후의 결정까지 소송절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인권의 핵심은 그것이 양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권은 각자의 지위, 민족, 종교나 출신지에 상관없이 개개인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집니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누구로부터도 빼앗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권은 우리 중 최고의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인권이 우리를 보호해주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인권은 우리를 우리로부터 구해줍니다.

덧붙여서, 언제 사형이 사용되더라도, 비슷하거나 더 악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누군가는 살해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이 보여줍니다. 처형된 수감자들은 필연적으로 가장 악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난해서 자신들을 변호해줄 노련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없는 이들이거나, 비교적 잔혹한 검사와 판사를 만나게 된 사람들기도 합니다.

테러리즘이나 정치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 사형이 필요하지는 않나요?

테터리즘과 정치 범죄에 싸울 책임이 있는 공무원들은 사형 집행이 그러한 행위를 멈추기보다는 늘리는 경향이 있다고 반복적으로 지적해왔습니다. 처형은 그에 대한 기억이 자기 집단의 전환점이 되는 순교자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믿는 바를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남녀에게-자살 폭탄 테러의 예에서처럼- 사형 집행의 가망은 범죄를 억제하기는커녕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국가의 사형 이용은 무장 적대 그룹에 의해서도 복수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되어 왔으며, 폭력의 순환을 지속시킵니다.

수감자를 오랜 기간 혹은 평생 가둬두는 것이 그 개인을 처형하는 것보다 오히려 잔인하지 않나요?

수감자가 살아있는 한, 그 또는 그녀는 사회복귀의 희망이나 나중에 무죄가 입증되어 면죄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형 집행은 사법 오류의 배상 또는 범죄자의 갱생 가능성을 제거합니다.

사형은 수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건들을 함축하는 독특한 형태의 처벌입니다. 즉, 처형 자체의 잔인함, 그리고 (때로는 몇 년 동안) 예정된 집행을 응시하며 죽음의 줄에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잔인함이 그것입니다.

극형에 대한 전세계적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이 실제로는 서양이 “우리들에게 문화적 가치를 부과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하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실 건가요?

앰네스티 인터내셔날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에 기반한 인권 담론의 다양성을 환영하며 다양한 비전들이 우리의 인권 이해에 기여한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앰네스티는 인권이란 보편적이며 불가분하며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인권이 종종 서양의 맥락에서 발달했더라도, 그것들은 내용상 서양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전통으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UN의 모든 회원국들이 따르기로 동의한 기준으로서 주지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 극형의 사용을 포기한 많은 국가들이 나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형의 폐지는 세계 사회의 한 구역에서만 옹호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형에 반대함으로써,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은연중에 그것을 허용하는 주류 세계 종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요?

주류 세계 종교들은 그 가르침에 있어서 자비, 동정, 용서를 강조합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 모든 처형의 중지를 외치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과 일관됩니다.

모든 종교의 교파들이 사형의 사용을 계속하는 세계 각지의 국가들에서 발견됩니다.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사형을 폐지한 세계 각지의 국가들에서도 종교 경계선을 넘나들며 발견됩니다. 사형은 어떤 특정 종교에도 배타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사형의 폐지를 어떤 특정 종교에 대한 공격으로 앰네스티 인터내셔날의 캠페인을 해석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날은 국제 인권에 관한 일에 기반을 두는, 민족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비정치적인 기구입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전세계 회원들은 전지구에 걸쳐 온갖 종교로부터 나옵니다.

공중의견의 다수가 사형을 선호한다면 어떻게 국가가 그것을 폐지할 수 있나요?

대중이 사형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복잡하고 사실적 기반이 부족한 것일 수 있습니다. 사형의 현실과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대중들이 완전한 정보를 제공받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폐지를 수용하길 더 바라게 될 것입니다.

종종 사형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를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결과는, 대중의 의견의 복잡성과,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국가 내 범죄 상황, 그 원인과 대처 수단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형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매우 자주, 그것이 범죄에 맞서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대중이 압도적으로 원하는 것은 사실 범죄를 줄이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입니다. 정치가들이 범죄에 맞서는 수단으로 사형제를 옹호하면, 대중은 그것이 문제에 대처하게 되리라 믿고 요청할 것입니다. 사형을 통한 인권 남용에 호소하지 않고 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정부의 책무입니다.

정보를 제공받은 대중의 의견은 교육과 도덕적 리더쉽에 의해 형성됩니다. 정부들은 대중의 의견을 인권과 범죄정책에 관한 것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형을 폐지하자는 결정이 정부와 입법부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한 결정은 사실 역사적으로 거의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수의 대중이 사형을 선호하더라도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형이 폐지되더라도 보통 대중으로부터 큰 항의는 없으며 거의 항상 폐지된 채로 남게 됩니다.

대중의 다수가 요구한다고 해서 악명높은 수감자를 고문하거나 인기없는 소수민족을 박해하는 것으로부터 정부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노예제는 한때 합법적이었고 널리 수용되었습니다. 노예제의 폐지는 도덕적 기반 위에서 그것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다년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형제 폐지를 위한 싸움이 이기고 있다는 어떤 기미가 있나요?

지난 세기의 전환기에는 오직 세 국가만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폐지했었습니다. 오늘날, 21세기를 열어가면서, 세계 3분의 2의 국가들이 법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사형을 폐지했습니다. 사실상 지난 십 년간 한 해 평균 세 나라가 법적으로 사형을 폐지했거나, 일반 범죄에 대하여 폐지하고 있다가 모든 범죄에 대하여 폐지했습니다. 게다가, 한번 폐지되고 나면, 사형은 거의 재도입되지 않습니다.

[폐지국과 존치국의 최신 목록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웹사이트 http://www.amnesty.org의 사형 페이지에서 제공됩니다.]

다른 기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유럽이 사형 없는 지역으로 출현한 것과, 뒤이어 전세계적 폐지를 추진하는 역할을 발달시킨 것.

아프리카 대륙은 대체로 처형이 없으며, 오직 여섯 지역의 53개국만이 2006년에 국가 살인을 집행한 것으로 알려짐.

미합중국은 천천히 극형으로부터 돌아서고 있음. 치사 주사 절차에 관련된 법적 난제들과 우려들 때문에 2006년에 많은 주에서 사형집행이 사실상 보류되었음.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서는 사형에 대한 강력한 대중적 지원이 있어서, 거의 40에 달하는 지역 정부와 40,000 명 이상이 모라토리엄 청원서에 서명했음. 뉴욕 주에서는, 2004년 주의 고등법원이 주의 사형 법령에 위헌 판결을 내렸음. 2007년 초까지, 이 법은 번복되지 않았음. 뉴저지 주에서는 2006년, 입법부가 모라토리엄을 부과하고, 주 내의 사형에 관련된 모든 측면을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음. 2007년 1월의 최종 보고서에서, 그 위원회는 사형의 폐지를 추천했음.

사형에 반대하는 세 차례의 세계 회의 개최, 사형에 반대하는 세계 연합의 창설, 아시아의 반 사형 행동 네트워크(ADPAN) 같은 국제적 연합들의 형성 등으로써 보여지는 바와 같이, 폐지론 기구들 사이에 늘어나는 소통과 협동.

(그 수가 증가하고 있는 국가들에 의해, 구속력 있는 폐지 위원회들의 도입과 비준을 포함하는) 국제 표준의 급증, UN 조직들의 행동, 그리고 국제 법정과 조약 관리 주체들의 결정들과 추천들.

이러한 경향은 사형을 대체할 효율적이면서도, 정의의 이름으로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계획적이고 냉혈한 인간 살해와는 무관한 처벌들이 있다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음을 반영합니다.

치사 주사lethal injection는 사람을 죽이는 가장 고통 없고 인도적인 방법인가요?

치사 주사의 사용에 있어서 문제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과테말라에서 1998년 2월 10일 있었던 첫번째 치사 주사 처형 때, 마누엘 마르띠네즈 꼬로나도Manuel Martínez Coronado에게 치사 주사를 집행해야 했던 사람들이 (보고에 따르면 부분적으로 수감자의 아내와 아이들이 흐느끼는 괴로운 소리로 인해) 명백히 너무도 신경이 과민해져서, 독을 전달할 선을 붙이는 데에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후 형 집행 중 정전으로 인해 독의 흐름이 멈췄고 수감자가 죽는 데엔 18분이 걸렸습니다. 그 모든 시련이 국가 텔레비전에 생방송으로 방송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정맥 주사 마약 사용으로 인해 수감자의 핏줄 상태가 나빠져서 생기는 문제들 때문에, 많은 수의 치사 주사 처형이 망쳐졌습니다.

1979년에 저지른 살인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은 푸에르토 리코 원주민 앙겔 니에베스 디아즈Angel Nieves Diaz는, 2006년 12월 13일 치사 주사로 죽는 데 34분이 걸렸습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두건을 뒤집어쓴 의사가 앙겔 디아즈가 죽었다고 신호하기 전에 약을 일회분 더 주사해야 했습니다.

최후까지 무죄를 주장했던 앙겔 디아즈에게 불리한 법정 증언을 했던 주요 검찰측 증인이 증언을 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집행은 계속되었습니다. 형이 집행되기 겨우 약 한 시간 쯤 전에, 플로리다 치사 주사 절차의 합헌 문제와 함께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던 앙겔 디아즈의 최후 진술을 대법원은 거절했습니다.

2006 년 12월 15일에, 플로리다 주지사 젭 부시Jeb Bush는, 집행을 중지하고 치사 주사에 의한 죽음이, 잔인하고 이례적인 처벌에 대한 플로리다의 금지령을 위반하는지 평가할 조사단을 임명했습니다. 조사단이 2007년 3월에 결과를 보고할 때까지 사형 집행 영장들은 더 이상 서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미국의 주들도 비슷하게 자기들의 치사 주사 프로토콜을 검사함으로써, 이 표면적으로 “인도적인” 방법이 다른 방법들보다 덜 잔인하거나 고통을 덜 주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힘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미합중국은 치사 주사에 의한 처형을 거의 30년 전에 도입하여, 1982년에 그것을 최초로 적용시켰습니다. 그 이후, 거의 900에 달하는 수감자들이 미국에서 이 방법으로 살해되었으며, 다른 대체 방법들-전기 의자, 교수형, 가스, 총살을 거의 교체해왔습니다. 미국 법에 도입된 이후 거의 20년 동안, 치사 주사는 중국, 과테말라, 필리핀(필리핀은 2006년 6월 사형을 폐지했지만.), 대만, 그리고 태국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치사 주사는 다른 형태의 처형이 야기하는 많은 불쾌한 결과들-단두시의 신체적 훼손과 출혈, 감전시의 살 타는 냄새, 가스로 죽이거나 교수형시의 보기 안 좋은 장면들/소리들, 불수의적인 배변과 배뇨-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사 주사는 국가를 위해 의료인을 관련시킴으로써, 의료 윤리의 오랜 원칙들을 훼손시켜야 한다는 위험을 증가시킵니다.

어떤 형태의 처형이든 비인도적입니다. 알려진 모든 방법들은 고통스러울 수 있으며 고유의 불쾌한 특성을 갖습니다. 더군다나 사형은 수감자가 감방에서 끌려나와 죽임을 당할 때까지의 잠깐 동안에 관한 것이 아니며, 그나 그녀가 선고 받은 순간부터 무의식과 죽음의 순간에 이를 데까지 수감자는 죽음의 형벌을 머리 속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인도적인” 방법을 찾으려는 탐색을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살해를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인도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정부에게, 그리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살해를 집행해야 할 대중에게, 처형을 보다 입맛에 맞게 맞추려는 탐색입니다.

이것과 다른 주제들에 관한 우리들의 광범위한 자료들을 http://www.amnesty.or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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