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무쌍(金字無雙)

금자문의 당주를 찾으며 두 시진을 꼬박 마당 한 가운데에 뿌리 박힌 나무처럼 서 있던 남루한 차림의 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말씨도 근방의 것이 아니었다.

“귀문의 절기가 당대무쌍이라는 세간의 소문을 듣고, 적을 두고 지낼만한 곳일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자 멀리서 찾아왔소이다.”

당주는 첩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객의 언행을 두루 살피면서도, 침착하게 당주의 예를 갖추고 손님의 첫마디에 겸손을 가장한 자화자찬으로 답했다.

“허허, 과찬이올시다. 소문이 해협 너머로 천리마처럼 달리면서 살이 비만하도록 붙었나 보오. 당대무쌍 여부까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었으나, 그래도 금일까지 단 일회도 패퇴의 고배를 시음해 본 적이 없다는 것 정도는 사실이외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두 시진 동안 주변에서 까불던 문하들을 보고 소문의 진위에 의심을 품고 있던 참이오.”

예의를 갖춘 당주의 겸손에 오만방자한 대꾸가 돌아오자 좌중이 술렁였다. 출신 모를 객의 한마디로 졸지에 오합지졸 취급을 당한 문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경악하면서도, 형식상으로는 문주가 찾아온 손님을 맞고 있는 장면인지라, 노기를 띤 눈으로 다 함께 객을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성미를 다스릴 줄 모르는 어린 것들 중에는 벌써부터 온 몸에 살기를 품고 당장이라도 뛰어들 자세로 좌불안석하는 자마저 있었다. 당주 역시 당돌한 대꾸에 대노하였으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짐짓 예를 가장하며 마치 객의 불손이 없었던 일인양 넘어가려고 할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어린 것들이라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이 있소이다. 본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멀리서 오신 귀한 객 앞에서까지 그렇게 까불고 돌아다니며 수련에 힘을 쓰는 것 아니겠소이까.”
“아니, 어린 것들 뿐만 아니라 다 자란 것들도 까불며 돌아다니기는 매한가지였소. 처음에는 무언가 배울 것이 있으리라 일말의 기대를 했건만, 지금으로서는 이 따위 문파가 어떻게 이 일대의 최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만 할 따름이오.”

한 점의 예조차 담지 않고 있는 지독한 언사에 그만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자들이 두엇 생겨났다. 그리하여 한 차례 가벼운 소동이 일어났으나 문제를 일으킨 주동들은 주변의 동문들에 의해 곧 제압당했다. 당주 곁의 수제자들 중 한 녀석마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자 당주가 막아서고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허식을 한 꺼풀 걷어낸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렇게 제 불초들이 어리게만 보이셨다면, 다 제 불찰이니 면목이 없소이다. 한 눈에 당문의 허약함을 파악할 줄 아시는 객공께서 직접 한 수 가르침을 주시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바라던 바요. 시간낭비할 것 없이 가장 센 놈으로 붙여주는 게 좋을 거요.”

더 이상 노기 띤 눈들만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 거친 호흡과 소매자락 서벅이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치욕 앞에서는 가장 약하고 어린 놈마저도 패기만은 하늘을 찌를 태세였다. 이윽고 거친 흥분이 진정되자 저마다 간절한 눈으로 당주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당주 역시 어중간한 놈으로 불필요한 모험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수제자들 중에서 가장 실력도 뛰어난 놈을 내보낼까 했으나 차기 당주감으로 점 찍어둔 탓에, 실력은 백중세이나 그보다는 조금 덜 아끼는 자를 내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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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왕자님

시리우스 왕자님.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 별에서 오신 시리우스 왕자님. 시리우스라는 지구 이름이 아닌 그대의 진짜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저의 못난 지구인 성대는 그대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저의 짧디 짧은 지구 주파수 목소리를 오늘만큼 원망했던 적이 없습니다.

오, 왕자님. 그대는 정녕 고향별로 돌아가셔야만 하는 건가요. 지구에 도착한 첫날 길가에서 비를 맞으며 떨고 계셨던 왕자님을 집으로 모시고 왔던 바로 그 날부터, 오늘까지 함께 했던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은 이제 정말로 영원히 지워져버리는 건가요. 비록 저는 내일 아침 지금까지 왕자님과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깨어나겠지만, 왕자님께서는 수만 광년 떨어진 우주 저 편에서 저를, 그리고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겠죠.

그래요, 그 유치한 이름도 제가 붙여드렸었죠. 시리우스 별에서 온 왕자님의 이름으로 시리우스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비 속에 떨고 계셨던 왕자님의 그 맑은 눈동자는 시리우스 별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났기 때문이랍니다. 13차원 좌표 이동을 통해 블랙홀과 웜홀의 사나운 소용돌이를 지나 머나먼 지구에 유배 오셨던 그 첫날부터, 그래요, 저는 사랑에 빠졌던 건가 봐요.

지난 몇 달 동안 저는 왕자님께 지구의 말을 가르쳐드렸고, 함께 웃으며 만화책을 읽었고, 인터넷 사용법까지 가르쳐드렸죠. 갓태어난 아기처럼 백지 상태로 제게 말을 배우시던 왕자님께서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저는 정말로 뛸 듯이 기뻤답니다. 부끄럽지만 방 안을 뛰어다니는 제 모습을 보셨으니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세계지도를 펴놓고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지도창을 닫고 별자리표를 열어 시리우스별을 찍으셨을 때만 하더라도 저는 왕자님이 미쳤거나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나 왕자님께서는 목에 걸고 계셨던 펜던트의 뚜껑을 열어 시리우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상현실 홀로그램화면으로 보여주셨죠. 색색의 오로라가 가득한 그 하늘. 우거진 숲과 드넓은 초원. 다채롭고 은은하면서도 신비로웠던 그 향긋한 꽃내음. 비록 아무도 살지 않는 가상현실 속이었지만, 분명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겠죠. 그토록 아름다운 곳은 지금껏 아무데서도 본 적이 없었답니다. 왕자님처럼 아름다운 분을 본 적도 없듯이. 돌이켜보면 비에 홀딱 젖어있는 모습마저도 당신의 고귀한 신분을 숨기지는 못했기에 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당신을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거겠죠.

이제 시리우스별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평화를 되찾은 백성들이 자기네 별을 다스려줄 왕자님을 다시 찾고 있기에, 오늘밤 드디어 시리우스의 UFO가 왕자님을 모시러 날아올 거라고 하셨지요. 고향별의 소식에 기뻐하시는 왕자님을 보면서 함께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왕자님께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왕좌로 돌아가시는 것이고, 저도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 뿐일 테지만, 저의 마음은 왜 이토록 아픈 걸까요.

놀이 기구를 타면서 금발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즐거워하시는 왕자님의 모습과, 그런 왕자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며 우리는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죠. 저 사진도 내일이 되면 사라지고 없는 걸까요. 시리우스의 기술은 정말로 그렇게 시간을 되돌리듯이, 컴퓨터 속에, 카메라 속에 남아있는 다른 사진들까지도 애초에 거기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모두 없앨 수 있는 건가요.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저 사진이 우리들의 거실에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그런 건 싫어요. 생애 처음으로 느껴본 이 행복의 파편이라도 희미한 꿈 속의 기억으로 남겨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제가 조금쯤 기억을 한다고 해서 왕자님을 만나러 시리우스로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왕자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시리우스로 전화를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그린 엉터리 그림들을 칭찬해 주시고, 제가 만든 맛없는 음식들도 맛있게 드셔 주시는 왕자님을 보면서, 저는 철 없게도 이런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만을 바랬답니다. 아니, 그러면서도 저는 내심, 이 꿈만 같은 행복이, 이 꿈보다 더한 행복이 언제 깨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날은 오늘 이렇게 갑자기 정말로 오고야 마는군요. 아, 시간이 여기서 멈추어 준다면 좋으련만! 그 잘난 시리우스의 과학이라는 것도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건가요?

아무리 시리우스의 첨단과학으로 제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하셔도, 저는 당신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에요. 행복의 기억은 무엇으로도 지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왕자님의 얼굴을 기억해내고야 말겠어요. 사진 한 장 못 남겨주시겠다면 상상 속의 어렴풋한 얼굴을 그림으로라도 그리겠어요. 그리고 또 그려서 저만의 사진을 반드시 다시 만들어내고야 말 거에요. 앞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반짝이는 시리우스를 보며 저는 그 미소를 떠올릴 거에요. 제가 왕자님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 티없이 해맑고 밝은 미소. 꿈 속에서라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에요.

이제는 정말로 보내드려야 할 때일 테지요.
다음에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엔 같은 별에서, 아니 같은 은하계에서만이라도 태어날 수 있기를.
왕자님이 계신 곳의 반짝이는 별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볼 수 있을 테니까.

안녕. 시리우스 별의 이름 모를 왕자님.
안녕. 나만의 시리우스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