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비동물성 고기는 가능할까?

동물권 « decadence in the rye

‘스컴 스키밍’은 배우기가 어렵지 않았다.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치킨 리틀’에게서 잘라낸 지 얼마 안 되는 슬라이스로 아침을 먹고, ‘커피스트’로 입가심을 한다. 커버올 작업복을 입은 다음 그물을 들쳐 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가운 햇볕을 쬐며, 몇 에이커나 되는 해조류가 덮인 탱크 위를 걷는다. 천천히 걷는다면, 30초 정도마다 맛있는 탄수화물이 숙성되어 튀어나온다. 그 위를 스키머)더깽이를 긁어내는 국자)로 살짝 긁어내어 수직 갱도 속에 던져 넣는다. 그 속에서 그것들은 한데 뭉쳐지거나, 변형 처리되어 치킨 리틀에게 먹일 포도당이 된다. 그리고 치킨 리틀은 슬라이스되어 배핀랜드에서 리틀아메리카까지 사는 사람들이 먹을 식량으로 공급된다. 한 시간마다 물통의 음료수를 마시고, 소금 캡슐을 삼킨다. 두 시간마다 5분씩 쉰다. 해가 질 때면 커버올을 벗고 저녁을 먹으러 간다(역시 치킨 리틀의 슬라이스). 그리고 자기 개인 시간을 보낸다.

프레더릭 폴과 콘블루드의 판타지 소설, 『우주 상인』에서 미래의 식생활에 대해 상상해본 내용이다. ‘치킨 리틀’은 거대한 고깃덩어리로, 직경 수백 피트나 되며, 해조류를 먹으며 배양기 속에서 자란다. 이 아이디어는 공상과학소설 작가들보다 더 저명하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1932년,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썼다. “앞으로 50년 후면, 우리는 닭을 통째로 키워서 그 가슴살이나 날개만 먹고 만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적절한 수단을 통해 그런 부위만을 키우면 되는 것이다.” 처칠의 예언은 미래의 식량 생산보다는 히틀러의 침략 무기 쪽에서 더 나았지만, 그건 그의 타이밍이 어긋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물권리 운동 쪽에서는 내연기관이 수백만 마리의 수송용 소와 말들의 고통을 없애준 것처럼 결국 ‘시험관 고기’가 지금 식육용으로 희생되고 있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의 고통을 없애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미 채식주의 햄버거, 소시지, 베이컨 등등의 가짜 고기 제품들을 보았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유행하면서 제례 의식에 고기가 쓰이는 일이 없어졌으며, 황제의 요리사들은 글루텐과 두부를 써서 여러 가지 고기 요리나 해물 요리와 유사한 맛의 요리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황제는 계속해서 중국의 전통 요리들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전통은 아직도 중국계 채식주의자 식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채식주의자들은 ‘가짜 고기’에 반대하는데, 그것이 고기야말로 음식의 중심이라는 인상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육식자들도 이를 싫어하는데, 그 맛과 질감이 고기와는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시험관 고기’는 가짜 고기 같지 않고, 진짜 고기와 같은 맛과 질감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론상으로는 배양기에서 고기를 키우는 편이 동물을 통째로 키우는 것보다 효율적이다. 처칠의 말처럼, 먹을 수 없는 뼈나 건강에 좋지 않은 지방, 그리고 내키지 않는 내장까지 만들 것 없이 곧바로 스테이크나 닭가슴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양 고기는 공장식 농장 고기보다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도 적을 것이다. 어떤 배설물도 내놓지 않을 테니까.

과학자들은 이미 실험실에서 소량의 근육 조각을 생산했다. 2001년,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과학자 한 사람이 두 명의 네덜란드 기업인과 함께 인공육 생성법 특허를 신청했다. 근육 세포를 영양소 용액에 넣고 그 분열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네덜란드 사람들 말고도 미국에서 몇몇 과학자가 인공육 생성을 연구했으나, 아직은 성공사례가 없다. 하지만 결국은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진짜 문제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고기가 살아있는 동물에게서 얻은 고기에 비해 경제성이 있느냐이다.

어느 과학자는 지금 실험실에서 생성에 성공한 근육 조각이 킬로그램당 500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했다! 하지만 불과 50년 전, 컴퓨터를 하나 만드는 데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보통 가정에서 하나씩 두고 쓸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언젠가 배양 고기가 식량 생산의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면, 우리는 육식에서 아무런 윤리적 문제점을 보지 않게 되리라. 물론 이때 원형 세포는 살아있는 동물의 세포이다. 그러나 그런 세포는 무한히 분열-복제될 수 잇으므로, 이론상으로는 한 마리의 동물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고기를 공급하고도 남게 된다. 사람의 식사거리가 되기 위해 어떤 동물도 고통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피터 싱어, 짐 메이슨. 죽음의 밥상. 376-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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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

채식주의
인간 식성의 디폴트는 잡식이다. 조상들이 대대로 고기를 즐겨 먹어왔고, 60억 현생 인류도 모두 잡식의 소화 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오래도록 먹어왔으며, 심지어는 대체로 고기를 아주 맛있어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전제라는 얘기이다. 적어도 완전한 채식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채식주의자는 그런 노력을 들일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해 내야 한다. 게다가 종자에 단백질을 저장하는 콩과 식물의 진화라는 대단한 우연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채식은 불가능했거나, 최소한 훨씬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채식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면 전환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주장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텐데- 국가의 제도로서 존재하는 사형과는 다르게, 채식 자체는 사회 제도로서가 아니라 각자 따로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랫 동안 불교 승려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도구 아닌 목적으로서의 동물 권리 같은 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채식주의’는 그저 일정 지분을 차지해내는 것이 실질적/궁극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겠다.

내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육식에 반대하려면, 아예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동물을 식용 같은 도구적 목적으로 키우지조차 말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동물의 권리이다. 즉, 동물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귀한 생명이며, 식용이라던가 모피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공감이 그것이다.

종차별주의

피터 싱어는 이러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애완동물이나 고등동물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감하며 식용 동물을 예외로 삼는다던가 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고등동물 종차별주의자임;;; 구체적으로는 대충 야생 설치류를 확실히 제외시키고 중대형 포유류를 전부 포함시키는…)

흠, 짚고 넘어갈 것이, 동물의 권리는 대변되는 권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 권리의 수호를 위해서는 동물 권리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 대변자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건 동물뿐만 아니라, 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가난하거나 멍청하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회적 약자인 인간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현대 문명의 필수 기능 중 하나가 아니던가. (동물을 포함하여) 약자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까, 관심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 기능적으로야 후자가 중요하겠지만, 당위성의 문제에서는 전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변자에 의해 대변될 수만 있는 권리라면, 그 선도 좀 확실히 그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하는 말이 재미있기는 해도, 과연 달팽이가 개와 똑같은 의미에서 친구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개와 달팽이가 스스로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개 쪽이 훨씬 더 할 말이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개의 권리를 더 강력하게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는 품게 된다. 그렇다면, 개의 권리를 더욱 강력하게 대변해주는 것이 달팽이에 대한 더러운 종차별주의일까?

그런데 여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쾌고 감수 능력만을 도덕적 근거로 삼는 공리주의이다. 고통은 나쁜 것, 모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식이다. 거기에 동의하더라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도마뱀은 신체 절단 영화를 보면서 일상의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모든 동물의 고통을 차별없이 동일하게 보는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는 공리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의 불살생 자비심에 가깝지 않나 싶다.

고기되기 vs 고자되기
개체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쾌락과 고통뿐일까? 가장 먼저 “번식” 문제가 떠오르는데- 사육 동물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씨암탉과 종마 등등, 번식의 기회가 인위적으로 극소수의 개체에게만 집중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소위 “중성화”된 애완동물은 움직이는 완구하고 뭐가 다른가. 동물들의 고통만큼이나 번식 사정을 고려해주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동물권을 인정한다면 고통을 줄이는 것보다도 자유로운 교미를 가능케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내가 동물이라면 (자체 검열 생략…)
수단과 목적

피터 싱어의 책, 『동물 해방』은 다이어트용이라고 광고했으면 잘 팔렸을 듯… 읽고 나면 (특히 고기에 대한) 식욕이 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 내용이 좀 낡기는 했어도- 포인트는 훌륭하게 잘 잡고 있고, 조금 오바하는 감은 있어도-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주제이기도 하므로, 추천 도서.

내 생각에 이 책의 포인트는 이거다. “우리가 정말로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동물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추상적인 표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닭장 안에 좀 더 많은 닭을 쑤셔넣음으로써, 닭들이 낑겨죽어나가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더라도, 살아남은 닭의 전체 숫자가 늘어남으로써, 총 판매 수익이 최적이 되는 밀도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먹여봤자 소화관만 꽉 채워줄 뿐 판매할 고기의 양을 늘리지 못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 도살되기 전의 동물을 쫄쫄 굶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각종 마루타 실험을 인간 대신 쥐, 개, 침팬지에게 마음껏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새뮤엘 버틀러는 “암탉은 계란이 또 다른 계란을 만드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A hen is only an egg’s way of making another egg)”라고 쓴 바 있다. 물론 버틀러는 자신이 우스갯소리를 하였다고 생각했다. 그 후 프래드 C. 할리(그는 225,000마리의 산란닭을 관리하는 조지아 가금 공장의 공장장이었다.)가 암탉을 “계란 생산 기계”라고 묘사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의 말은 더욱 심각한 내용을 함축하게 된다. 할리는 사무적인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 그 말에 덧붙여 “계란 생산의 목적은 돈벌이다. 이 목적을 잊는다면 계란 생산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잊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영국 영농 잡지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오늘날의 산란닭은 결국 매우 능률적인 전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암탉은 낮은 유지 조건으로 원료(사료)를 최종 생산물(계란)로 바꾸는 기계에 불과하다.
-피터싱어. 동물해방. 191쪽.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커트 보네거트의 “챔피언의 아침 식사(breakfast of champions)”라는 소설에서 읽었던 비슷한 대목이 기억나서 검색해봤다.

“Your parents were fighting machines and self-pitying machines. Your mother was programmed to bawl out your father for being a defective money-making machine, and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bawl her out for being a defective housekeeping machine. They were programmed to bawl each other out for being defective loving machines.
“Then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stomp out of the house and slam the door. This automatically turned your mother into a weeping machine. And your father would go down to a tavern where he would get drunk with some other drinking machines. Then all the drinking machines would go to a whorehouse and rent fucking machines. And then your father would drag himself home to become an apologizing machine. And your mother would become a very slow forgiving machine.”

누군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대충 이런 것이다.

극히 최근에서야 우리는 인간을 수단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이상을 사회 제도 속에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구현해냈다. 이제 동물들도 생각해줘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람답게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줘야 할 문제이다.

동물 해방

(…)동물과 유사한 정신 수준에 놓여 있는 인간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못지 않게 동물의 목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그렇게까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진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이 책에서 옹호하는 결론들은 오직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리로부터 도출된다. 고통 없이 동물을 죽이는 것 또한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이 책의 일부 결론들의 정당성을 부가적으로 지지해 준다. 하지만 엄격하게 따져 볼 때,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논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논변이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흔히 대중들은 어떤 죽임도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 기초하여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을 도출하는 데에도 필수적이진 않다는 점이다.

이 장에서 내가 취한 입장에 대해서 독자들은 이미 약간의 반박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물들이 서로 죽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가? 식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는 굶어야 하는가? 주요 논의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나는 이러한 질문들과 다른 반박을 검토하기 위한 별개의 장을 마련해 놓았다. 자신들의 반박에 대한 답변을 빨리 듣고자 하는 자들은 먼저 6장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피터 싱어. 『동물 해방』. 64-65쪽.

모기불 통신을 구독하다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혼자 자습 중입니다. ㅋ

네, 그렇습니다. 인간 능력의 능선과, 장애의 골짜기, 나이의 등고선 등을 타고 오르내리다 보면, 비슷한 고도에 펼쳐져 있는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마주하게 되죠. 정자 난자 레벨까지 내려간다면, 뭐 웬만한 생물은 다 아우른다고 봐야… 

속도와 정도의 문제일 뿐, 생물을 향한 윤리의 외연 확대는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기도 하고.

저 같은 공상가는 이러한 인간-동물 비유 논리에 덧붙여서-

영영 못 볼 것도 같지만 당장 내일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는 외계 생물과,

이미 조금씩 우리 주변에 생겨나고 있는 듯한 전자 생물, 기계 생물?

까지도 우리 윤리의 대상에 미리 포함시켜 두고 싶습니다.

그들보다 우리들과 훨씬 더 가까운 주변 친척 생물들을 외면하고서 어찌 ET나 월E와 친한 척을 할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