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주장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텐데- 국가의 제도로서 존재하는 사형과는 다르게, 채식 자체는 사회 제도로서가 아니라 각자 따로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랫 동안 불교 승려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도구 아닌 목적으로서의 동물 권리 같은 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채식주의’는 그저 일정 지분을 차지해내는 것이 실질적/궁극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겠다.
내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육식에 반대하려면, 아예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동물을 식용 같은 도구적 목적으로 키우지조차 말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동물의 권리이다. 즉, 동물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귀한 생명이며, 식용이라던가 모피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공감이 그것이다.
피터 싱어는 이러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애완동물이나 고등동물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감하며 식용 동물을 예외로 삼는다던가 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고등동물 종차별주의자임;;; 구체적으로는 대충 야생 설치류를 확실히 제외시키고 중대형 포유류를 전부 포함시키는…)
흠, 짚고 넘어갈 것이, 동물의 권리는 대변되는 권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 권리의 수호를 위해서는 동물 권리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 대변자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건 동물뿐만 아니라, 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가난하거나 멍청하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회적 약자인 인간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현대 문명의 필수 기능 중 하나가 아니던가. (동물을 포함하여) 약자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까, 관심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 기능적으로야 후자가 중요하겠지만, 당위성의 문제에서는 전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변자에 의해 대변될 수만 있는 권리라면, 그 선도 좀 확실히 그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하는 말이 재미있기는 해도, 과연 달팽이가 개와 똑같은 의미에서 친구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개와 달팽이가 스스로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개 쪽이 훨씬 더 할 말이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개의 권리를 더 강력하게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는 품게 된다. 그렇다면, 개의 권리를 더욱 강력하게 대변해주는 것이 달팽이에 대한 더러운 종차별주의일까?
그런데 여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쾌고 감수 능력만을 도덕적 근거로 삼는 공리주의이다. 고통은 나쁜 것, 모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식이다. 거기에 동의하더라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도마뱀은 신체 절단 영화를 보면서 일상의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모든 동물의 고통을 차별없이 동일하게 보는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는 공리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의 불살생 자비심에 가깝지 않나 싶다.
피터 싱어의 책, 『동물 해방』은 다이어트용이라고 광고했으면 잘 팔렸을 듯… 읽고 나면 (특히 고기에 대한) 식욕이 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 내용이 좀 낡기는 했어도- 포인트는 훌륭하게 잘 잡고 있고, 조금 오바하는 감은 있어도-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주제이기도 하므로, 추천 도서.
내 생각에 이 책의 포인트는 이거다. “우리가 정말로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동물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추상적인 표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닭장 안에 좀 더 많은 닭을 쑤셔넣음으로써, 닭들이 낑겨죽어나가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더라도, 살아남은 닭의 전체 숫자가 늘어남으로써, 총 판매 수익이 최적이 되는 밀도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먹여봤자 소화관만 꽉 채워줄 뿐 판매할 고기의 양을 늘리지 못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 도살되기 전의 동물을 쫄쫄 굶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각종 마루타 실험을 인간 대신 쥐, 개, 침팬지에게 마음껏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영국 영농 잡지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커트 보네거트의 “챔피언의 아침 식사(breakfast of champions)”라는 소설에서 읽었던 비슷한 대목이 기억나서 검색해봤다.
“Then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stomp out of the house and slam the door. This automatically turned your mother into a weeping machine. And your father would go down to a tavern where he would get drunk with some other drinking machines. Then all the drinking machines would go to a whorehouse and rent fucking machines. And then your father would drag himself home to become an apologizing machine. And your mother would become a very slow forgiving machine.”
누군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대충 이런 것이다.
극히 최근에서야 우리는 인간을 수단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이상을 사회 제도 속에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구현해냈다. 이제 동물들도 생각해줘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람답게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줘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