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채식주의
인간 식성의 디폴트는 잡식이다. 조상들이 대대로 고기를 즐겨 먹어왔고, 60억 현생 인류도 모두 잡식의 소화 기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오래도록 먹어왔으며, 심지어는 대체로 고기를 아주 맛있어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전제라는 얘기이다. 적어도 완전한 채식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채식주의자는 그런 노력을 들일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해 내야 한다. 게다가 종자에 단백질을 저장하는 콩과 식물의 진화라는 대단한 우연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채식은 불가능했거나, 최소한 훨씬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채식으로 전환이 가능하다면 전환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주장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텐데- 국가의 제도로서 존재하는 사형과는 다르게, 채식 자체는 사회 제도로서가 아니라 각자 따로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랫 동안 불교 승려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도구 아닌 목적으로서의 동물 권리 같은 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안 먹어도 된다면 먹지 말자는 채식주의’는 그저 일정 지분을 차지해내는 것이 실질적/궁극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겠다.

내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육식에 반대하려면, 아예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동물을 식용 같은 도구적 목적으로 키우지조차 말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동물의 권리이다. 즉, 동물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귀한 생명이며, 식용이라던가 모피 같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공감이 그것이다.

종차별주의

피터 싱어는 이러한 공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애완동물이나 고등동물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감하며 식용 동물을 예외로 삼는다던가 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와 마찬가지 의미에서, 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르며 비난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고등동물 종차별주의자임;;; 구체적으로는 대충 야생 설치류를 확실히 제외시키고 중대형 포유류를 전부 포함시키는…)

흠, 짚고 넘어갈 것이, 동물의 권리는 대변되는 권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물 권리의 수호를 위해서는 동물 권리에 관심을 가지는 인간 대변자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건 동물뿐만 아니라, 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가난하거나 멍청하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회적 약자인 인간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현대 문명의 필수 기능 중 하나가 아니던가. (동물을 포함하여) 약자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까, 관심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까? 기능적으로야 후자가 중요하겠지만, 당위성의 문제에서는 전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변자에 의해 대변될 수만 있는 권리라면, 그 선도 좀 확실히 그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달팽이도 우리의 친구지예-” 하는 말이 재미있기는 해도, 과연 달팽이가 개와 똑같은 의미에서 친구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개와 달팽이가 스스로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개 쪽이 훨씬 더 할 말이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도 개의 권리를 더 강력하게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는 품게 된다. 그렇다면, 개의 권리를 더욱 강력하게 대변해주는 것이 달팽이에 대한 더러운 종차별주의일까?

그런데 여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쾌고 감수 능력만을 도덕적 근거로 삼는 공리주의이다. 고통은 나쁜 것, 모든 고통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식이다. 거기에 동의하더라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도마뱀은 신체 절단 영화를 보면서 일상의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모든 동물의 고통을 차별없이 동일하게 보는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는 공리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의 불살생 자비심에 가깝지 않나 싶다.

고기되기 vs 고자되기
개체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쾌락과 고통뿐일까? 가장 먼저 “번식” 문제가 떠오르는데- 사육 동물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씨암탉과 종마 등등, 번식의 기회가 인위적으로 극소수의 개체에게만 집중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소위 “중성화”된 애완동물은 움직이는 완구하고 뭐가 다른가. 동물들의 고통만큼이나 번식 사정을 고려해주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동물권을 인정한다면 고통을 줄이는 것보다도 자유로운 교미를 가능케 해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내가 동물이라면 (자체 검열 생략…)
수단과 목적

피터 싱어의 책, 『동물 해방』은 다이어트용이라고 광고했으면 잘 팔렸을 듯… 읽고 나면 (특히 고기에 대한) 식욕이 뚝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 내용이 좀 낡기는 했어도- 포인트는 훌륭하게 잘 잡고 있고, 조금 오바하는 감은 있어도-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주제이기도 하므로, 추천 도서.

내 생각에 이 책의 포인트는 이거다. “우리가 정말로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동물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추상적인 표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닭장 안에 좀 더 많은 닭을 쑤셔넣음으로써, 닭들이 낑겨죽어나가는 비율이 크게 늘어나더라도, 살아남은 닭의 전체 숫자가 늘어남으로써, 총 판매 수익이 최적이 되는 밀도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먹여봤자 소화관만 꽉 채워줄 뿐 판매할 고기의 양을 늘리지 못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 도살되기 전의 동물을 쫄쫄 굶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각종 마루타 실험을 인간 대신 쥐, 개, 침팬지에게 마음껏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 새뮤엘 버틀러는 “암탉은 계란이 또 다른 계란을 만드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A hen is only an egg’s way of making another egg)”라고 쓴 바 있다. 물론 버틀러는 자신이 우스갯소리를 하였다고 생각했다. 그 후 프래드 C. 할리(그는 225,000마리의 산란닭을 관리하는 조지아 가금 공장의 공장장이었다.)가 암탉을 “계란 생산 기계”라고 묘사하였는데, 이 때부터 그의 말은 더욱 심각한 내용을 함축하게 된다. 할리는 사무적인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 그 말에 덧붙여 “계란 생산의 목적은 돈벌이다. 이 목적을 잊는다면 계란 생산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잊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영국 영농 잡지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오늘날의 산란닭은 결국 매우 능률적인 전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암탉은 낮은 유지 조건으로 원료(사료)를 최종 생산물(계란)로 바꾸는 기계에 불과하다.
-피터싱어. 동물해방. 191쪽.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던 커트 보네거트의 “챔피언의 아침 식사(breakfast of champions)”라는 소설에서 읽었던 비슷한 대목이 기억나서 검색해봤다.

“Your parents were fighting machines and self-pitying machines. Your mother was programmed to bawl out your father for being a defective money-making machine, and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bawl her out for being a defective housekeeping machine. They were programmed to bawl each other out for being defective loving machines.
“Then your father was programmed to stomp out of the house and slam the door. This automatically turned your mother into a weeping machine. And your father would go down to a tavern where he would get drunk with some other drinking machines. Then all the drinking machines would go to a whorehouse and rent fucking machines. And then your father would drag himself home to become an apologizing machine. And your mother would become a very slow forgiving machine.”

누군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다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대충 이런 것이다.

극히 최근에서야 우리는 인간을 수단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이상을 사회 제도 속에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구현해냈다. 이제 동물들도 생각해줘야 할 때가 아닐까?
사람답게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줘야 할 문제이다.

초파리의 기억

내용은 흥미로웠다. 초파리 얘기만 많이 들어봤지, 실제로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는데, ebs 교양 프로 한 편 본 느낌. 중간중간 삽화나 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

지난번, 핀치의 부리 에서, 인용들이 어째 나중에 끼워넣은 것처럼 따로노는 듯 싶다 그랬는데, 이 책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글을 쓰다가 관련있는 듯한 내용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그걸 또 그때그때 전부 써버리는 것이 조너선 와이너라는 작가의 스타일인 듯. 읽는 사람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나는 별로였지만.

읽다가 마음에 걸린 부분들을 (오탈자는 빼고) 대충 기록해봤음. 대부분이 번역서의 문제였고, 독서를 방해할 정도로 심하다 싶은 문제들도 종종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상당 부분이 번역자 자신보다도 출판사측의 부실한 검토 문제인 듯. 책에 써있는 출판사 홈페이지(www.eclio.co.kr)에 글을 남길까 했는데, 마땅히 남길 곳도 없기에 걍 이 밑에 달아둔다. (사실 이 책을 출판했었다는 사실을 찾을 수도 없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쪽. 감수자 최재천의 추천사.

내가 김동인의 소설 내용을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자식이 부모의 발가락을 닮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사람 발가락이 다 거기서 거기 대충 똑같이 생긴 건데, 그런 발가락을 보고 자기랑 닮았다며 위안을 얻는, 오쟁이진 남자 얘기 아니었나. 흠. 누가 자기랑 미남/미녀 배우가 닮았다고 그러면 “그래.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것이 닮았다.”며 놀리듯이.
그나저나 최재천 교수의 글은, 읽을 때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 느낌의 원천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그는 연단 위의 교장선생님을 연상케 한다.

갓 태어난 거위 새끼는 하늘을 나는 새의 그림자를 보고 왼쪽으로 움직이면 어미 거위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매로 인식한다.어미 거위의 그림자를 보고는 겁을 먹지 않지만 매의 그림자가 싶으면 재빨리 달아난다.
27-28쪽.

목이 길고 꼬리쪽이 짧은 어미 거위, 목은 짧고 상대적으로 꼬리쪽이 긴 매, 따라서 대충 뭐 이렇게 –x- (x는 날개) 생긴 그림자 그림 한 장이라도 넣어줬어야지. 그냥 왼쪽 오른쪽이라고 말로만 설명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임? 나야 딴데서 이 얘기를 그림과 함께 본 적이 있어서 무슨 얘긴지 대충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뭥미 했을 듯. 작가에게, 그림 안넣고 글로만 묘사하는 데에 무슨 강박이 있나 싶음.

기원후 2세기 그리스의 의학자 갈렌(…)
33쪽.

별거 아닌데, 갈렌->갈레노스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그 비밀을 품고 있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셰익스피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1612년에 완성한 마지막 작품 『폭풍우 The Tempest』에서 프로스페로(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작가 자신과 가까운 인물. 모든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의 원형)는 자신의 양자 칼리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악마놈, 그놈은 악마야. 타고난 악마.
아무리 가르쳐도 그놈의 천성은 고칠 수 없단 말야.

34-35쪽.

이건 명백히 번역자의 잘못. 바로 앞에 ‘본성’과 양육’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의 셰익스피어 얘기를 하고 나서 등장하는 인용문인데, 정작 인용된 내용 속에는 본성이나 양육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온다는 게 말이 돼? 앙? 내가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구글로 막 스펠링도 어려운 셰익스피어를 영어로 쳐넣는 고생 끝에 직접 원문을 찾아봤어. “A devil, a born devil, on whose nature Nurture can never stick”이라고 나오네. “악마, 타고난 악마, 그 본성에, 양육이 도통 안 먹히는 놈” 뭐 이런 얘기인 것 같아. 물론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은 이렇게 어거지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전문 문학번역자의 번역을 찾아옮기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단어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인용의 경우엔 최소한 원문을 같이 실어주기라도 해야하는 거 아닐까? 읽는 사람 벙찌잖아. 그렇다고 어떤 번역본을 인용했는지 밝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블 벙찜…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
71쪽.

역주에 약간 의문. 선불교 승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선승(참선하고 있는 중-역주)”라고 하기보다는. 음.

길게 꼬인 분자 사슬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 천문학자들 눈에 비친 행성의 모습이나 20세기 초반 물리학자들이 바라보던 원자의 모습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댈 수도 없는 작은 점일 뿐이었다.
73쪽.

현미경으로 행성 보신 적 있으세요? 본 적 없으면 말도 하지 마세요.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다윈은 런던동물원에서의 실험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나는 런던동물원의 아프리카산 큰 독사 앞에 있는 두꺼운 유리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뱀이 갑자기 달려들어도 절대 놀라서 뒤로 물러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내 결심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엄청난 속도로 뒤로 펄쩍 물러났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 이성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험을 상상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14~115쪽.

이건 문제점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했던 비슷한 짓이 떠올라서 재미있길래 기록해둠.

주사


다윈이랑 같은 종에 속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ㅋㅋㅋ

어느 날 교수회의에서 윌슨이 생태학자를 한 명 더 채용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윌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신이 나갔답니까?”/”무슨 뜻입니까?”/”생태학자를 채용하려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18쪽.

둘 중 하나(아마도 후자)는 왓슨일텐데. 번역하면서 둘 다 윌슨으로 써버리는 실수를 한 듯. 혼자 정신 나간 듯이 자문자답하는 꼴이 됐다.

그는 한 식물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꽃의 속명을 지었다는 사실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더구나 그 꽃은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자신의 자서전 『내 인생의 추억 Memories of My Life』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 우생학에 대한 간단한 설명 몇 줄과 함께 ‘갈토니아 칸디칸스’의 그림을 조그맣게 삽입했다.
131쪽.

여기서 “그”는 골턴. 역자는 인명과 학명을 한글로 옮길 때 골턴Galton과 갈토니아Galtonia와의 연관성을 좀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암수가 한 몸인 이 초파리는 그리스어 ‘여성gyne’과 ‘남성andr’을 따서 ‘자웅모자이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174쪽.

‘여성gyne’+남성andr’ = ‘자웅모자이크’ -_- 이 역시 원문 병기가 필요한 부분.

그 명판 위에는 수컷 초파리 다리에 있는 성즐(수컷 초파리의 앞다리에 있는 까만점-역주)의 현미경 사진을 붙였다. 수컷은 성즐을 이용해 암컷에 달라붙는다.
211쪽.

역주가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 까만점 가지고는 암컷은커녕 어디에도 달라붙을 수 없으니. 성즐이라는 것이 그저 까맣기만 한 점 같은 것이 아닐 거라는 걸, 나 같은 문외한도 내용만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이해 없이 피상적으로 어딘가에서 베껴오는 역주라는 삘링…

213쪽 이후에 계속 나오는 ‘피리어드’ 유전자는 158쪽에서 ‘주기period’라고 불렀던 유전자와 같은 것인 듯. 겨우 몇십 페이지 떨어져 있다고 용어통일에 실패하면 찜찜하지.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복제생물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217쪽.

복제생물이 그리스어로 작은 가지? 말이 안 되잖아. 역시 원문 병기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인데 번역자가 홀랑 빼먹었다.

“나는 스물세 번째 호메오박스(초파리의 호메오틱 선택 유전자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염기배열-역주)는 연구하고 싶지 않다.”
309쪽.

또 하나의 있으나마나 한 역주. 龍(용 용). 뭐 이런 느낌.

진실로 향하는 길

… 잘못된 사실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에 큰 해악을 끼친다. 그러나 잘못된 견해도 어느 정도의 증거를 바탕으로 지지된다면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은 건전한 즐거움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잘못으로 향하는 경로 하나가 폐쇄되는 동시에 진실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기불이님께서는 과학책에 유통기한을 두자고 하십니다만, 흥! 1809년에 태어난 사람이 쓴 이 과학책, “인간의 유래”를 읽는 기쁨은 매우 컸습니다. 이 책에 유통기한을 둔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옛날옛적 유클리드의 과학책? “기하학 원론”이 직관과 연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희열을 준다면, 이 책은 경험과 귀납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순수한 기쁨을 준다고나 할까요. 신중함과 자신감을 모두 갖춘 성실한 지성만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결과물입니다. 중간에 사슴이 어쩌고 풍뎅이가 어쩌고 줄줄이 나열할 땐 좀 졸렸지만 -_-; 그래도 지루한 부분을 견디고 나니까 막판에 다시 감동의 폭풍이 휘몰아칩디다.

“이거 왼쪽을 보니까 1234가 있고 오른쪽을 보니까 6789가 있음. 이건 아마도 5인 듯 ㅇㅇ.”

“1, 2, 3, 4, 5, 6, 7, 8, 9 다음에는 아마도 10이 올 것 같음. ㅇㅇ”

기본적으로 미취학 아동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렇게 간단한 논리만 가지고 생명의 비밀을 풀어내다니, 짱 아닙니까? 열심히 지구 전역에서 동식물 표본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하던 시대에 드디어 다윈이 생명의 주기율표를 발견한 겁니다. 사실 시대가 그런 시대였던지라 월리스의 공동발견도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다윈이 아니었더라도 생물 진화의 이론은 마침내 세상에 알려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윈만큼 잘, 성실하게, 탁월하게, 간단하게™ 정리해서 내놓으려면 백년은 걸렸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