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주부에게 팔려나가기 전에 제품의 제조 과정에서는 물론 표의 대량 도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사형을 촉구하는 푸딩을 사든 사형에 반대하는 푸딩을 사든, 그 푸딩들이 담겨있는 플라스틱 용기는 똑같다. 푸딩 제조업자는 플라스틱 제조용기 업자에게 용기를 대량으로 구매하는데, 물론 이 때에도 푸딩 제조업자는 당당한 소비자로서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 이를 테면 가장 싼 값에 푸딩 용기를 제공하는 제조업자가 우연히도 사형을 촉구하는 용기를 판매하고 있다면, 애석하게도 사형에 반대하는 푸딩을 구매한 소비자 입장에서는, 알맹이는 반대하지만 껍데기는 촉구하는 우스운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다. 더욱 얄궂은 일은, 이 플라스틱 용기 제조업자 역시 소비자로서 석유에서 추출한 원재료를 구매해야 하는데, 이 때 사태는 또 한번 꼬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원자재 판매자는 석유를 사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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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 골드버그 기요틴 -6-
요즘엔 그런 음모론도 떠돌고 있다.
마트에 간 주부가 상품을 골라 카트에 담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은 품질이나 가격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다. 이를 테면, 유기농 표시(금연 표시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꽁초 대신 좀비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가 붙은 푸딩을 살 것인가, 비유기농 표시(싱글벙글 웃고 있는 동전 그림이 그려져 있다.)가 붙은 푸딩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식품에 붙는 각종 인증 표시들은 처음에는 해당 식품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사항들에 관해서만 표기하곤 했다. 예를 들어 비타민씨가 들어있다거나, 칼로리가 적다던가 하는.
그러다가 약간 쓸데없다 싶은 것들까지 붙이기 시작했다. 이 베이컨이 된 동물이 살아있을 적에 홍삼 달인 물을 타먹였다거나 하는.
그 즈음에, 해당 상품과 딱히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들에 관한 표시들도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제조과정에서 제3세계 아동 노동력을 착취하지는 않았다던가, 중금속을 배출하지 않았다던가 하는 표시, 그리고 전체 수익금의 영쩜 몇퍼센트는 특정 질환 환자나 특정 국가, 또는 포장에 사진과 간략한 신상이 써있는 어느 소년소녀가장처럼 하여튼 돈이 필요할 듯한 누군가를 위해서 쓰겠다는둥 하는, 어딘가 쫌스러운 표시 같은 것도 등장했다.
이런 기묘한 판매 방식이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파고드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늘 한 가정 주부는 현대 자본민주주의의 1원1표 원칙에 따라 소중한 1표의 권리를 총 43940원 어치 행사했다. 그녀가 장바구니에 수북이 담은 물건들은 다음과 같다.
현재 대통령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에서 만든 소세지: 대통령의 활짝 웃는 얼굴 로고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현재 대통령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만하면 일을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통령의 매출/득표 순위는 십칠년째 1위를 달리고 있다. 이기는 편에 붙는 건 언제나 안도감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을 준다. 주말에 교회에 영수증을 가져가면 일정비율 헌금에서 공제도 해줄 것이다.
이 동네에 공원을 만들기 위한 기금을 마련한다는 표시가 붙어있지만, 사실은 공원 부지를 핑계로 동네 집값 상승을 막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인 임대 아파트 단지를 몰아내기 위한 기금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지역 제조 웰빙 상표가 붙어있는 두부. 깨알같이 현재 시의원의 재선에도 도움을 준다고 써있다.
그리고 사형을 촉구하는 푸딩: 국민 모두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푸딩을 아무도 사지 않음으로써, 이론상, 언제든지 사형을 폐지할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이리라.
그 외 아무런 기부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차익을 상품 가격으로 고객들에게 돌려드린다는 표시가 붙어있는 음료수 따위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처럼 상품의 구매를 정치적 투표와 연계시킨 정책의 최대 장점은 바로 실시간 집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 이 가정주부가 신용카드로 결제를 한 순간, 구매한 상품의 정보는 정부로 전송되어 1) 소세지 값은 자동으로 소숫점 아래 몇 자리 초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현직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시켜주었고, 2) 두부 값은 그 주부가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상승시켜주었을 것으로 기대되며, 3) 푸딩 값은, 이 푸딩을 먹을 아이가 타고 있는 놀이터 시소에 달린 센서에 전원이 들어오게 하였다.
모든 사형은 이렇게 시작된다.
출생 순서에 따른 정치적 태도
영국의 심리학자 한스 이젠크는 정치사상의 2차원 모형을 주창했다. 그는 보수주의/자유주의 차원 말고도 정치적 태도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박약/완고 차원을 제안했다. 이젠크의 모형은 정치적 목표와 전술 사이의 구분을 강조한다. 완고한 개인들은 단호한 정치적 행동을 선호한다. 완고한 개인들이 보수주의 정치를 신봉할 경우 그들은 통상 법과 질서, 강력한 군대, 사형 제도의 필요성을 지지한다. (생략) 보수주의든 자유주의든 완고한 개인들은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프랭크 설로웨이, 타고난 반항아, 393-394쪽.
전에 사형제도 얘기하면서 알기 쉬운 예시로 인종 차별 얘기 좀 꺼냈던 적 있는데, 일면 비슷하다고 한 것을 가지고 똑같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인종차별은 반대하지만 사형은 찬성하는 사람 기분을 좀 상하게 했던 것 같아서, 내가 좀 심했나 싶은 기분이 든 적이 있다.
근데 책을 읽다가 위와 같은 도표를 읽고 나니, 까짓거 뭐 비유인데, 따지고 보면 못알아듣는 사람이 더 문제인 거고, 너무 식상하기 짝이 없는 비유였던 듯도 싶어서, 기왕 하는 비유 앞으로는 좀 덜 식상하고 상큼한 예시를 좀더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도표를 참고하려고 했는데, 강제병역은 아직 예로 삼기엔 한국사회에서 사형제도와 비슷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다음 번에는 유대인이나 파시스트, 아니면 절대 군주제를 써먹어 보는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