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돌파 한글라간

제가 뭐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모국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동시대의 한국어를 난잡할지언정 생생하고 정확하게 구사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난 며칠 간 생각해본 걸 주절주절 늘어놓아 봅니다.

떡밥이 쉬었으니 싫다 밉다 정줄논듯…하는 식의 짤막한 논평들은 이미 여러 곳에서 쏟아져 나왔으니, 저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한번 풀어써보겠습니다.

음, 동시대 네티즌 동지 여러분을 위한 한 줄 요약부터:

언어, 특히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글로 남겨질 어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읽기

프레스 프렌들리

세리자와 박사의 괴수퇴치연구 -후렌들리

덧글로 쓸까 하다가 길어지길래…

세리자와님께서 프렌들리를 프렌들리라고 읽으면 몰쌍놈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정말 몰쌍놈인가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프렌들리라고 썼으면 [프렌들리]로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신라를 [실라]로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어의 경계 내에서 표기-발음 체계상의 일관적인 변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편입된 한국어로서의 외래어를 그냥 외국 발음으로 읽어버리는 것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시기상조가 아닌가 해요. 물론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한글 표기된 외래어를 읽으면서 (특히 [f]발음을) 원어식으로 발음하는 현상이 퍼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새롭고 신기한 현상일 뿐, 그게 반드시 옳은 방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현상이 앞으로 한국어에 어떤 식으로 정착될지도 모르겠구요.

프레스 프렌들리를 [press friendly]로 읽는 것은 아예 신라-[실라] 같은 문제와는 상관이 없어요. f, l, r, 그리고 심지어 모음 없이 자음만 발음하는 따위의 영어식 발음체계가 한국어의 일부로 편입되지도 않았고, 설사 일부 계층에게 있어서는 어느 정도 편입되었다고 치더라도, 특히 마지막 것은 현재로서도 상당히 요원하니까요.. (프레스를 [프레쓰]라고 읽는 것 정도가 그나마 현재로선 최대한 양보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한국어 발음의 경계를 넘지 않고, 오히려 부합되는 면도 있으니까요.)

물론 프레스 프렌들리 같은 경우 외래어라기보다는 섣부른 외국어 차용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등에 의해 “프레스 프렌들리”라고 굳이 한글로 표기된 것을 읽을 때 도로 외국어 발음으로 읽어줘야 할 필요도 없다고 봐요. 그런 말을 쓰고 읽고 하다 보면 외국어가 외래어가 되는 거겠죠. 그리고 별다른 표시 없이 그냥 한글로 써서 문장 중간에 끼워넣었다는 것은 외국어 단어를 마치 외래어처럼 한국어의 일부로서 적극적으로 차용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읽으면서 다시 [press friendly]라고 발음해주는 것이, 영어에도 익숙한 일부 한국어 사용자에게는 자연스러운 발음일지 몰라도, 여전히 한국어의 경계를 자의적으로 넘나들고 있는 것이며, 다른 많은 한국어 사용자에게 뭔가 어색한 느낌을 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경계는 단순히 표기법상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발음에도 있어요. [f] 발음이 단순히 [ㅎ]나 [ㅍ] 또는 그 중간 발음 같은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듯이, [p]조차도 단순히 [ㅍ]의 대응물이 아니잖아요?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p]로 인식하는 소리의 음운학적/음향학적 특성이, 한국어 사용자가 [ㅍ]으로 인식하는 소리와 많이 겹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한국어 문장 중에 외국 발음이 포함되어야 하는 경우가 만약 있다면, 영어 발음 교육에 대한 영어 강좌 같은게 있긴 하겠지만, 그 경우에도 정말로 외국 발음으로 읽히기를 원했다면 따로 주석을 달던가 아예 알파벳으로 표시한다던가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에 인수위 위원장의 말을 전부 한글로 받아적어버린 기사들은 나름대로 위원장을 골려준 셈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애초에 위원장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기도 했지만. ㅋㅋㅋ)

말 나온 김에, 위원장의 삽질은 무엇보다도, 한국어와 영어의 발음 차이가 단순히 한글 표기를 달리함으로써 극복될수 있다고 본 것일텐데요. 각종 기호와 법칙과 발음법을 새로 도입한 무슨 외국어 표기법이라도 새로 만들어 쓰지 않는 이상,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한글 외래어 표기법의 변화만으로는 뛰어넘을 수도 없고 뛰어넘을 필요도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위원장께서 조화유의 영어 강좌를 너무 열심히 들으신 모양입니다. 오오, 법훼이! 조오지 붓쉬! 락컵휄러 쎄너! 우왕ㅋ굳ㅋ!

지금이 무슨 19세기 말이라서 책 한권만 달랑달랑 가지고 영어를 배워야 하는 세상이었다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 저렇게 표기해서 영어 발음 공부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카세트 테이프라도 하나 사서 들으세요. 최첨단 엠피뜨뤼 사시라는 말씀은 차마 못드리겠네요. 아 맞다. 그리고 혹시 집에 사전이라는 물건이 있다면 한번쯤 본 적 있으시겠지만, 발음을 표기할 때 쓰라고 발음기호라는 것이 이미 만들어져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답니다.